비난양파, 칭찬양파

운이좋았다.

by 김준성

비난양파

학창시절, 칭찬양파와 비난양파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칭찬양파에게는 칭찬을 했다.
비난양파에게는 비난을 했다.


며칠 뒤, 칭찬양파는 싹이 났고
비난양파에는 곰팡이가 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티커를 서로 바꿔 붙였다면 결과도 바뀌었을까?


비난양파는 도대체 뭘 잘못했을까.


매운 것 말고는, 딱히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 비난양파는 처음부터 ‘비난’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 이름 하나 때문에, 비난을 받을 준비가 된 존재가 되어버렸다.


선생님이 먼저 비난을 시작한다.
아이들은 그걸 보고 배운다. 그리고 따라 한다.


마치 원래 그래야 했다는 듯,
“왜 하필 그 양파였을까” 같은 질문은 사라진다.

학생들은 결국 하나의 공식을 외운다.
욕하면 아파지고, 칭찬하면 좋아진다.


하지만 그 공식이 무서운 이유는,
욕이 아픈 게 아니라
욕이 ‘대상’을 만들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칭찬양파

옆에 있는 양파가 썩어가고 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칭찬양파는 싹이 나고 있다.


같은 물을 먹었을 텐데.
같은 공간에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성장이 온전히 좋은 것만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썩음이 누군가의 비료가 되는 장면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기분이었다.

결국 실험이 끝나면 버려지는 건 똑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의 싹을 ‘정답’이라고 부른다.


싹이 난다고 해서, 정말 좋은 걸까.


만약 스티커가 달랐다면 어땠을까.

칭찬양파가 비난을 받았다면,
비난양파가 칭찬을 받았다면.


그때의 나는 이런 결론밖에 내릴 수 없었다.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


양파는 결국 먹기 위해 존재한다.
자신의 매운맛으로 누군가의 요리를 완성하고,
어떤 날에는 국물의 바닥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그 양파는 실험용이 되었다.
배움을 위한 과정이라고들 말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희생’이라 부른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희생이라고 불리는 당사자는, 정말 그렇게 느꼈을까.

누군가의 배움이 누군가의 썩음 위에 세워진다면,
그 배움은 반쪽짜리일지도 모른다.

그 실험을 보고 자란 우리가 배워야 할 건“욕하면 아파지고, 칭찬하면 좋아진다” 같은 공식이 아니라,
애초에 누군가를 실험용으로 만들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나는 이제 그런 배움이 더는 필요 없었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상처를 증명해야만
우리가 옳아지는 방식 말고,

그냥,
다음 희생이 없어지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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