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올까요?

[리더쉽 에세이] 눈 마주치는데 1년, 스몰톡까지 2년

by 이드 쉐이퍼

"들으셨죠?"

D님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알겠다는 대답을 하지도 않는 분이었습니다. 재차 확인하면 그때서야 화들짝 놀라며 대답을 하곤 했어요. 저뿐 아니라 모든 분들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모습에 오해는 없었지만 과연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는 분일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데 1년, 먼저 스몰톡을 시작하는 데 2년이 걸릴 만큼 내성적인 성격의 D님. 극단적이랄만큼 내성적인 성격과는 반대로 업무에서만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죠, 해야죠", "해보면 될 것 같아요"라며 담담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만의 고유한 리듬이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감춰진 강점을 찾아서

성격을 교정하는 것은 리더의 역할이 아니다. 합류한 팀원에게 어떤 강점이 있는지, 그 강점이 어떤 상황에서 가장 발휘되는지를 파악하고 업무와 잘 연결시켜 주면 그만이다. 살면서 처음 보는 정도의 내성적인 사람이라는 점을 뒤로하고, D님의 업무적 강점을 관찰하였다.


첫째, 커뮤니케이션보다는 실행력.

말로 설명하거나 의견을 개진하는 건 어려워하지만, 결과물로 이야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손이 정말 빨라서 업무를 대화로 이해하는 과정을 시안으로 대체하는 수준이었는데, 그 방향이 크게 이탈하지 않아 결과적으로는 더 빨리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둘째, 극단적 상황에서 오히려 안정감이 발현됨.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감정의 동요가 적고, "해야 할 일이니까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접근하는 편이었다. 업종 특성상 일 년에 2~3번 정도의 100여 가지 이상의 제품 리뉴얼을 해야만 했는데, 반복적이고 스트레스가 높은 업무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에 대해 (겉으로는) 단 한 번도 감정적인 모습을 보인적이 없었다.

셋째, 간결한 입력 값만 있으면 풍부한 출력이 가능함.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보다는 어느 정도 방향성이 제시되었을 때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곤 했다. 컨셉 키워드와 몇 가지 레퍼런스를 전달하면 정확하게 내가 구상했던 디자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분이었다.


속도로 증명하는 사람

D님의 첫 번째 특징은 압도적인 작업 속도였다. 신규 제품 패키지가 필요할 때면, 무드보드와 일러스트 톤을 제시하기만 해도 다음 날 오후쯤이면 완성된 시안을 들고 오곤 했다. 특히 여름 뮤트 톤의 채도가 낮으면서 차분한 컬러와 부드럽고 시원한 선과 형태의 일러스트를 뽑아내는 감각이 탁월했다.

이런 업무 처리 속도는 출시 일정이 타이트한 제품을 준비할 때 진가가 드러나게 된다. 랩 형태의 새로운 제품이 출시되었을 때였다. 기존에 없던 카테고리의 제품이라 패키지 디자인부터 새롭게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협업 팀에서 요구하는 것도 정말 새로운 접근이라 레퍼런스 서치와 스케치를 거치려면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종종 그렇듯 일정은 타이트했고, 어쩔 수 없이 내가 구두로 컨셉을 가볍게 전달하고, 레퍼런스도 서너 장 간단히 전달했다. 이틀 정도 드릴 테니 시안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다음 날 오후, 크게 수정할 것 없는 시안을 3가지 가져왔다. 메인 오브젝트 위치와 스케일 조정, 컬러 바레이션만 한 후 바로 발주로 넘길 수 있었다. 빠르게 진행한 디자인 치고 고객 반응이 유난히 좋았는데, 고객 리뷰에 "패키지가 이쁘다"라는 피드백을 자주 받았던 거의 유일한 제품이 되었다.


혼란 속에서 더 빛나는 능력

상술했듯이 업종 특성상, 1년에 2-3번 정도 대대적인 제품 리뉴얼이 있다. 원재료 변경 건이 잦기 때문이었는데, 이때마다 제품 디자인을 맡은 D님과 E님은 야근이 불가피할 정도로 업무가 가중되곤 했다. 한 제품의 표시사항이 변경되면 이에 맞물려 변경되어야 하는 디자인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D님의 진가가 드러났다. 빠른 손에 더불어 감정적이지 않은 커뮤니케이션 톤으로 협업하는 팀에서 일정 관리가 틀어질 때마다 D님이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이런 강점을 살려 대대적인 리뉴얼이 있을 때마다 일정 관리를 전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말수는 적지만, 필요한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각 팀원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복잡한 일정을 한눈에 정리해서 공유하는 모습을 보며, D님만의 고유한 가치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조금씩 전해지는 것들

그러던 어느 날, 그러니까 정말로 함께한 지 만으로 2년이 넘어가던 어떤 날, D님의 한 마디가 팀 전체를 웅성이게 했다.


"오늘 하늘 정말 이쁘지 않나요..?"


딱 이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5월 말에서 6월의 초입.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새하얀 구름이 매일매일 예쁘게 떠있던 날이었다. 사무공간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서서 D님이 하늘 사진을 찍으며 자신에게 저런 말을 했다며 팀원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유난히 말수가 적고 소통을 안 해주는 D님에 대해, 그러려니 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으리라. 어떤 사연과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 수 없기에 함부로 물어보거나 다그치지 못했던 시간을 함께 지나니, 같은 따뜻함을 공유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다.

D님의 태도는 조금씩 달라져왔었다. 대표님이 ‘팀장님이 어떻게 하셨길래 사람의 인상이 달라지느냐’라는 말을 할 정도로 표정이 생기고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간혹 대답을 안 해줄 때도 있지만, 그동안 쌓인 신뢰가 있기에, "들었죠?"라고 재차 확인하는 대신, D님만의 리듬을 인정하고 기다리고 있다.


조용한 사람들에게

D님과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제자리에서 묵묵히 맡은 바를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팀 전체의 균형이 잡히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리더는 사람들의 고유한 가치를 알아보고 그에 맞는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D님에게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보다는 실행력이, 열려있는 소통보다는 정확한 전달이, 주도적인 기획보다는 안정적인 관리가 더 어울렸으니까.


결과물로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변화가 많은 상황에서 안정감을 발휘할 수 있는 역할 부여하기

명확한 가이드라인 안에서의 창의성 발휘하도록 하기

그만의 리듬을 인정하고 기다려주기


눈을 마주치는 데 1년, 스몰톡까지 2년. 그 긴 시간 동안 D님이 보여준 건 화려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조용하고 확실한 힘이었다. 그리고 그 힘이 팀에게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지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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