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쉽 에세이] 빈 캔버스 앞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
"서로의 긍정적인 면을 끌어내고 습득할 수 있는 애틋한(?)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팀이 통합되면서 함께 일하게 된 C님이 제 생일 롤링페이퍼에 남긴 메시지였습니다. 외향적이고 스몰톡에 능숙해 보였지만, 함께한 시간이 짧아 아직 잘 알지 못하던 동료였어요. 하지만 이 한마디에서 이분이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와 업무를 선호하는 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케터 A님과 C님, 그리고 나. 세 명이서 마케팅 전략을 논의하는 정기 미팅에서 C님의 색깔을 처음 목격할 수 있었다. A님이 아이디어에 대한 실행 방안을 내놓는 스타일이라면, C님은 내가 던진 작은 아이디어 하나를 받아 상상 속에서 크게 키워내곤 했다.
신기했던 점은, "이런 걸 해보면 어떨까요?" 하고 스스로 새로운 방향을 제안해 놓고는, 갑자기 "그런 건 예산이 있으면 가능할 것 같아요" 또는 "근데 그게 정말 될까요?"라며 염세적인 태도로 돌변하는 거였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걸 누구보다도 좋아하지만 동시에 실행 가능성이 흐릿해지면 동기를 금세 잃어버리는 타입이구나. 그렇다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으면서도 분명한 지원이 보장되는 일부터 시작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님에게 처음 맡겨본 일은 서브 인스타그램이었다. 예전에 다른 브랜드용으로 만들었다가 방치된 계정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였는데, C님의 트렌드 감각과 밈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보면 공식 계정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B급 감성의 콘텐츠를 올리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KPI는 전체 팔로워 수가 아닌 신규 팔로워 유입률로 잡았고, 디자이너 B님과 함께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협업하도록 배치했다. 한두 달간 C님이 보여준 모습은 흥미로웠다. 처음엔 해외 밈 이미지에 대사만 바꿔 올리거나, 유행하는 BGM을 활용하는 식으로 이것저것 테스트해 보더니, 어느 순간부터 건강식을 꾸준히 챙겨 먹는 것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콘텐츠로 방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B님과 함께 직접 출연하는 영상 콘텐츠를 메인 콘텐츠화 한 것이었다. "샐러드 회사 직원은 무엇을 먹나?" 같은 주제로 콘텐츠를 만들고, 나중엔 다른 팀원들까지 끌어들여 밸런스 게임을 진행하는 등 콘텐츠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2분기 들어 서브 인스타그램에 대한 우선순위가 변동되며 리소스를 절감하지 않았다면, KPI 달성도 순조로웠을 것이다.
두 번째로 프로젝트는 페르소나 설정이었다. C님을 보며 든 생각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튼튼한 도화지와 마르지 않는 펜만 주면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큰 주제만 딱 던져보기로 했다.
자사몰 운영 데이터로 기존 고객이 누구인지 파악하고, 앞으로 우리가 타겟팅하고 싶은 고객은 누구인지 정의하는 일. 분석적 사고와 상상력이 동시에 필요한 업무였다. 함께 일할 파트너로는 디자이너 F를 붙여줬는데, 하나의 주제에 빠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F의 성향과 확장적 사고의 C님이 만나면 재미있는 화학작용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방법론을 찾아보던 C님은 사이코그래픽스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와선 이렇게 진행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방법론을 확정한 후부터 F님과 몇 주에 걸쳐 정말 심도 깊은 미팅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매주 2-3시간씩 화이트보드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얼마 되지 않아 세 가지 그룹으로 정리된 타겟 페르소나를 가져왔는데, 몇 가지 정의와 명칭만 다듬는 정도로 바로 쓸 수 있는 수준으로 완성을 해왔다. 처음 해보는 업무에 처음 만져본 방법론이었는데. 업무에 대한 이해와 습득력이 확실히 뛰어난 분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로 맡긴 건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광고 기획이었다. 범위가 매우 넓은 과제였지만, 이번에도 덩어리째 던져봤다.
C님은 또다시 방법론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USP 접근법을 제안하더니 경쟁사들의 USP와 코어 메시지, 코어 전략을 분석해 와서 "남들은 이렇게 하는데 우리는 어떤 걸로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함께 USP를 세 가지로 정리한 다음, 각각에 맞는 메시지 세트를 만들었다. 바로 광고를 돌려봤는데, 예상했던 A안과 B 안이 정말로 좋은 성과를 내며 2차 광고 세트까지 자연스럽게 이어갈 수 있었다.
C님과의 경험을 돌이켜보며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다.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채워나가길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공간과 자원, 그리고 무엇보다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넓은 캔버스가 주어질 때 창의성이 꽃피고, 동료와의 시너지를 통해 아이디어가 증폭되며, 실행 가능성이 보장될 때 지속적인 동기를 갖는다. 그리고 가시적인 성과를 통해 확신으로 바뀐다.
안타깝게도 회사 차원에서 비즈니스 구조가 바뀌며 C님 같은 사람을 충분히 활용할 만한 창의적 업무와 그걸 뒷받침할 지원이 어려워지는 시기가 찾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C님이 팀에서 가장 먼저 이직을 결정했다. 내가 파악했던 그의 업무 방식과 동기부여 스타일이 정확했다는 확신이 들면서도, 이런 창의적인 사람과 더 긴 시간 함께하며 시너지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서브 인스타그램에서 시작해 페르소나 설정, USP 개발까지. C님이 보여준 변화는 단순한 업무 성과를 넘어선 것이었다. 처음엔 "정말 할 수 있을까요?"라며 염세적이던 사람이, 점차 스스로 방법론을 찾고 제안하며 주도적으로 일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C님 같은 사람들은 '왜?'라는 빈 도화지 앞에서 가장 빛난다. 그 도화지를 채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과정을 믿고 지켜보는 것. 그것이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리더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걸, C님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