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쉽 에세이] 스스로를 ‘서브 캐릭터’라 칭하던 사람
“저는 주인공을 보조하는 서브 캐릭터입니다.”
한 지원자의 자기소개서 제목이었습니다. 화려하게 눈에 띄거나, 엄청난 퍼포먼스를 내는 주인공 타입이 아니라는 식의 설명이 이어졌어요.
그런데 포트폴리오를 열어본 순간,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혼자서 프로젝트의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스스로를 표현한 방식과 실제 사이의 괴리감이 느껴졌고, 그 간극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 사람은 스스로를 서브 캐릭터라고 생각할까? 제가 내린 가설은 이랬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지만, 그 길이 번번이 가로막혀 상처를 입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보통 디자이너는 시안 몇 가지 만들고, 사수(팀장 등)와 피드백을 주고받은 뒤 기획자에게 최종안을 전달한다. 팀 내에서 피드백을 받고 수정을 하기 위해 마감 하루나 이틀 전에는 컨펌 요청이 들어오기 마련인데, B님은 마감 당일, 그것도 한두 시간 정도 남겨둔 시점에서야 시안을 가져오는 일이 반복되었다.
당황스러웠다. 작업 방향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를 때가 많았고, 피드백을 주고 싶어도 시간상 여유가 없었다. “여유 있게 가져와주세요.”라는 말을 했음에도 반복되는 업무 방식이 일종의 반항인가 싶기도 했고, 내 리더십에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결국 1:1 대화 시간에 이유를 물었다. 원래부터 그런 식으로 일하는 습관이 있었는지, 혹은 우리 팀의 방식이 불편한 건지 알고 싶었다. 돌아온 대답에는 예상보다 깊은 배경을 담고있었다.
B의 전 직장은 전시 기획 회사였는데, B를 포함한 디자이너들은 사수 없이 각자 포스터 시안을 몇 개씩 만들어내야 했다. 시안을 여럿 만들어놓으면 큐레이터나 기획자가 모니터를 보며 뒤에 서서 무작정 평가했다고 했다. 상대적으로 손이 빠른 동료들은 한 번에 3개 정도의 시안을 냈지만, 그는 한두 개 개밖에 만들지 못했고, 그 결과 늘 지적과 모욕을 감수해야 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피드백은 곧 실격 통보라는 생각이 몸에 밴 것이다. 꽤 오랫동안 혼자서 마음을 다치고 버텨왔던 것 같았다. 피드백을 주면 기존 시안을 아예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습관 역시 그 경험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지적을 받으면 그 시안은 끝난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피드백이 더 나은 방향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증거처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님이 가진 감각은 분명했다. 팀 안에서 가장 실험적이고 트렌디한 그래픽을 시도하는 사람이었고, 새로운 그래픽적 시도를 하고 싶어 했다. 유행하는 시각적 트렌드를 슬쩍 반영해서 시안에 녹여오기도 했고, 디자인 플랫폼을 자주 탐색하며 ‘이런 게 요즘 떠오르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자주 건넸다.
해외 레퍼런스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능력도 있었고, 영어에도 능숙해서 시야가 넓다는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안정감 있는 프레젠테이션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 처리 방식 속에는 조심스러움이 있었고, 동시에 예민하게 벼려진 감각이 함께 있었다. 자기 제한이라는 단어와 잠재력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떠올랐다. 무리하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이 언젠가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강점이 빛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상처를 자극하지 않는 구조가 필요했다. 나의 전략은 단순했다. 그가 책임지고 몰입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자.
당시 한 달 간격으로 발행하던 브랜드 매거진 디자인을 통째로 맡기고, 튀는 아이디어와 기획이 필요한 서브 인스타그램, 컴퍼니 브랜딩 디자인 리드 역할을 부여했다. 여러 시안 중 하나를 선택받는 구조가 아닌, 하나의 영역을 온전히 책임지는 업무를 위주로 맡겨본 것이다.
1:1 미팅에서 B님의 강점을 구체적 근거와 함께 짚어주며, 단순한 격려가 아닌 실질적인 자신감을 형성하도록 했다. 또한 피드백을 줄 때도 디자인 의도를 먼저 물어본 후, “방향이 그렇다면 이 부분을 이런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더 좋을 것 같다"라는 방식으로, '망했다'는 인식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B님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을 인정하고, 중요한 자료 준비를 요청하거나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업무 브리핑이 필요한 경우 조언을 구하도록 연결했다. 팀 내에서의 역할을 '서브'가 아닌 '전문가'로 인식하도록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변화는 빨리 오지 않았다. 의견을 말하다가도 망설이고, 미팅에서는 긴장한 채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계속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 중 작은 사건이 있었다. 협업 미팅 자리에서 상대방의 평범한 반대 의견에 갑자기 책상을 치며 흥분한 태도를 보인것이다.
“그건 아니죠. 그렇게 할 순 없죠!”
대표님도 계셨던 자리였고, 순간 모두가 놀랐다. 오래 참아온 어떤 말이, 그날 처음으로 터져 나온 것 같았다. 미팅이 끝난 후 깊은 대화를 했고, 그동안의 피드백과 이 날의 일이 결합되며 스스로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 같았다. 이후 B님은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시안을 미리 공유하기 시작했고,
피드백이 이해되지 않으면 바로 물었다.
팀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커피 타임에 함께했으며,
업무 구조나 흐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제안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변화는, 굳이 드러내지 않던 B만의 감성과 위트를 더 이상 숨기지 않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밈을 알고 있는 듯한 개그력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웃자, 팀이 웃었다. 그가 말하자, 팀이 귀를 기울였다. 그가 존재감을 드러낼수록, 팀 전체의 분위기와 리듬도 유연해졌다. 무게감이 있던 사람이, 팀의 활력소로 바뀌어 가는 걸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B의 변화는 단순한 퍼포먼스의 문제가 아니다. 이 변화 안에는 한 팀이라는 신뢰, 존중받는다는 감각, 그리고 내 목소리를 꺼내도 괜찮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나 또한 B의 변화를 지켜보며 되새길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의 태도는 상처를 치유한 방식일 수 있다는 것
일방적인 피드백보다 먼저 필요한 건 맥락을 듣는 일이라는 것
잘못된 업무 방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
B는 정말 서브 캐릭터이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단 한 번이라도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건 아닐까.
모든 사람이 무대의 중심에 서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는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초반 태도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했다면, 중요한 팀원을 놓쳤을지도 모른다. B가 보여준 변화와 그 안에서 만들어진 신뢰와 가능성을 함께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사람마다 다른 리듬과 서사를 존중하는 리더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