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쉽 에세이] 깊게 고민하고 조용히 번뜩이는 사람
E님은 이해가 안 되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얼굴에 바로 드러나는 타입이었어요. 조용하지만 속마음을 숨기지 않는 솔직함이 있었습니다.
의견을 물어보면 아주 조용하게, 천천히 대답하곤 했는데 그 고민의 깊이가 일반적인 사람보다 훨씬 깊었어요. 생각을 많이 하고 동시에 많은 변수를 고려하는 타입이라 속도는 나지 않지만, 가져오는 결과물에서는 묘한 번득임이 보였습니다. 일종의 광기 같은 것이랄까요.
D님의 컬러가 채도 낮은 차분한 톤이었다면, E님은 형광빛에 가까운 톤을 사용했다. 같은 제품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색깔의 디자이너였다. E님이 만드는 일러스트에는 독특한 에너지가 있었는데, 밝고 생동감 넘치는 컬러와 자유로운 선이 만나 브랜드의 젊고 활기찬 면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동시에 작업 퀄리티에 대한 욕심이 강한 편이라, 고민되는 부분이 있으면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붙잡고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긴 편이라는 것을 인지한 후, 줄글이나 연필 스케치라도 좋으니 업무를 시작하기 전에 나와 충분히 대화하고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 생기니, 요청한 시안 외에 새로운 제안을 자주 들고 오기 시작했다. 신나서 일하는 사람의 그것이 그러하듯, 대부분 더 나은 제안이었다.
내가 가장 집중했던 점은, 반복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면서도, 앞장서는 것을 꺼린다는 점이었다. '굳이 내가?'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는 것 같았다.
E님은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인지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는 경향이 보였다. 이런 분들을 다룰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조용한 태도 안에 있는 그 열망을 다그치거나, 농담으로라도 면박처럼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할 줄 알면서 왜 매번 소극적인가요?"
같은 말 한마디면 '굳이 내가?'라는 생각이 더욱 강해질 것이 뻔했다. 내가 집중한 건 두 가지였다.
시간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가지치기 같은 예리한 피드백을 주는 것.
따를 수밖에 없는 논리적이고 명확한 방향성 말이다. 내 목표는 E님이 스스로 '나도 이만큼 해내고 싶다'라는, 아마 스스로는 ‘굳이’ 해본 적 없었을 강한 동기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회사에는 그렇게 많은 제품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럴싸한 제품 제안서 포맷 하나 없었다. 영업팀은 매번 PPT를 새로 만들어야 했고, 일관성 없는 자료들로 고생하고 있었다.
E님에게 이 프로젝트를 개발팀, 영업부서와 함께 리드해 보는 것을 추천했다. 내성적인 성격이기에 걱정을 많이 하는 듯 보였으나, 다른 작업 때와 마찬가지로 준비 기간을 길게 가져가며 우려되는 부분을 저와 짚어볼 수 있도록 했다.
"다른 팀 분들과 협업해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걱정이에요."
"진행 중에 막히면 어떻게 하죠?"
"혹시 제가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봐..."
몇 주간의 숙고 시간과 나와의 딥한 대화를 마친 후, 프로젝트를 오픈했다. 나는 킥오프 미팅에만 참여하고 그 이후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어떤 이슈가 생기던, E님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진행 결과, 총 5가지의 제안서 포맷을 개발하였다. 웹으로 만들어 수정과 업데이트가 용이한 구조였고, 사용하는 팀(주로 영업팀)에서 제품 정보를 업데이트를 하면 E님이 디자인적으로 살짝만 손보고 탈고하는 방식이었다. 지금도 이 문서를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E님이 각 부서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해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냈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예쁜 템플릿이 아니라, 업무 효율을 높이는 실용적인 시스템이었다.
제안서 프로젝트 이후로 E님에게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대하는 부분과 프로젝트 전체를 리드하는 것에도 자신감이 생긴 모습이었다. 다양한 미팅과 프로젝트 과정에서 의견을 개진하기 시작했고, 그 기세를 몰아 조만간 선보일 두 번째 브랜드 리뉴얼 프로젝트의 전체 무드를 보여줄 촬영의 컨셉 디렉팅을 진행하고 있다.
번득이는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것을 숨기려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접근이 필요하다.
✔ 열망을 자극하지 말고 스스로 발견하도록 기다리기
✔ '굳이?'라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충분한 자율성 보장하기
✔ 예리하지만 상처 주지 않는 피드백으로 방향성 제시하기
✔ 작은 성공을 통해 '나도 이만큼 할 수 있구나' 확신 만들어주기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저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번득이는 형광빛 같은 E님만의 재능이 이제는 팀 전체에 활기를 주고 있다.
굳이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에게는, 몰입할 수 있는 환경만 주어진다면 스스로 목표했던 것보다 더 좋은 성과를 낼 잠재력이 있다. 그 스위치를 켜는 건 리더의 몫이다. E님이 보여준 변화는 숨겨진 열망을 깨우는 리더십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