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 해방일지

[리더십 에세이] 완벽에 완벽을 기하던 사람

by 이드 쉐이퍼

F님은 저와 입사일이 한 달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팀원입니다. 당시 서울 경기권에 있던 21개의 매장 디자인을 전담할 점포 디자이너를 채용하고 있었는데, 사실 F님은 서류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원자였어요. 편집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공공기관 사보를 주로 작업하던 주니어 레벨 디자이너로, 공간 디자인이나 VMD 제작 경험은 전혀 없었거든요. 하지만 자기소개서에서 느껴지는 인내심과 도전 정신,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자기만의 철학을 쌓아가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이 다른 어떤 지원자보다 강하게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일지 1. 안정적인 기본기를 지녔지만

F님의 실무 능력은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처음 다루어 보는 매체의 디자인이어도 워낙 기본기가 탄탄한 데다가,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집요한 성격을 가진 덕분에 대략적인 콘셉트만 나오면 어떤 디자인이던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곤했다. 하지만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점포 애플리케이션 리뉴얼을 진행할 때였다. 메뉴판과 DID의 레이아웃은 완성도 있게 잡아오는 반면에, 그래픽을 입혀 디자인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었다. 편집 디자인적 기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그래픽 요소를 활용하는 것에는 뚜렷한 한계가 느껴졌다.

가져오는 시안들이 이전 작업들에 비해 아쉬웠고, 나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피드백을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여가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던 과정에서 F님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욕심 많고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답답한 것은 본인이었을 것이다.


상상력 해방하기

면담을 하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F님이 영화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가짜인데.. 몰입도 안되고 왜 봐야 하나 싶어요."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볼 때도 자기 계발이나 과학 같은 비문학 장르만 보는 편이었고, 문학이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스토리에는 전혀 감흥이 없는 사람이었다. 감각을 자극하여 내면에 있는 상상력을 해방시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넷플릭스 '블랙미러'를 보라고 권했다. SF적 요소가 있어 F님 성향에 맞으면서도,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는 시리즈기에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시도해 보자는 의도였다. 감사하게도 F님은 나의 피드백을 매번 성실하게 이행하고 그 결과를 꼭 말해 주는 분이었다. 정말 블랙미러를 보고 와서 해주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왜 보라고 하신 건지는 알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전히 가상의 이야기에는 잘 몰입이 안 되긴 하지만, 어떤 부분을 이끌어내야 되는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후로, 1:1 미팅에서 꾸준히

"만약 A가 B라면 어떻게 될까?", “사람들은 왜 00을 그렇게 느낄까?", “나는 ㅁㅁ를 왜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같은 상상과 추론을 오가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금씩 전해지는 변화들

일상에 감각적 자극을 더하고 상상력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접근하니 F님이 조금씩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흥미로운 콘텐츠들을 갖고 오기도 하고, 다른 브랜드의 레퍼런스를 분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더하여 전해주기도 했다. "우리도 이런 걸 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의도가 이렇다면 이런 방향으로 작업하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식의 다양한 응용 의견을 전해주기 시작했다.


일지 2. 멍석이 깔리면 떨려하는 사람

우여곡절 끝에 점포 어플리케이션 프로젝트가 잘 마무리되고, 시그니처 매장 콘셉트 기획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였다. B님과 F님이 각각 두 개씩 콘셉트 아이디어를 가져왔고 나와 몇 차례 다듬으며 완성도 있는 기획안을 완성했다. 마케팅팀과의 얼라인이 필요하여 킥오프 미팅을 잡기로 했다.

F님의 기획안은 구조적으로 탄탄하고 예시 레퍼런스와 무드보드도 굉장히 타이트하게 정리된, 밀도 높은 좋은 기획안이었다. 자리에서 F님의 모니터를 보며 마케팅팀 팀원들에게 설명을 하기 시작하는데 F님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는 내가 보기에도, A4 용지에 적어온 발표문을 든 손이 손이 떨릴 만큼 극도로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충분히 준비했는데, 평소에 격 없이 대화 나누는 분들 앞에서 말하는 편한 자리인데, 왜 이렇게 까지 긴장하는 걸까? F님의 준비과정이 고스란히 전달되도록, 이 부분을 반드시 해결해주고 싶었다.


두려움과 마주하기

과도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한 접근 포인트는 "상대방이 아닌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하기"였다. "내가 나에게 얘기한다"는 마인드로 전환해 보자는 것이었다.

"발표 상황에서의 긴장과 불안은 스스로 아직 못 알아채고 있는 두려움 때문 일수도 있어요. 명상 같은 방법을 통해 그 두려움을 직면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내면을 직면하기까지에는 당연히 시간이 걸리니 조급해하지 말고, 긴장감이 올라올 때 억지로 억누르려 하지도 말고 '아, 내가 지금 긴장하고 있구나.'라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길러봅시다."

이번에도 F님은 나의 이런 피드백을 오지랖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수용해 주었다. 제안한 것들을 실제로 실행해 보고 어땠는지 전해주며, 보다 근본적인 부분에 대해 자주 얘기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감정들을 마주해 나갔다. 본인의 노력을 인정해 주고 다양한 감각을 인식하며 F님의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일지 3. 맡겨보기

그렇게 F님과의 협업이 어느덧 6년 차가 되었다. 지금 F님은 우리 브랜드의 두 번째 디자인 리뉴얼을 리드하고 있다. 나는 초기 단계에서 타깃 페르소나와 브랜드 페르소나를 잡고, 이 두 페르소나를 활용하여 새로운 비주얼 무드의 근간이 될 무드보드를 만드는 과정을 리드했다. 그렇게 무드보드가 나오고 나니 F님에게 이후의 과정을 맡겨야 된다는 확신이 생겼다. 지금 이 시점에 F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온전히 리드해 봐야 그동안 함께 만들어온 성장의 마침표를 찍게 될 것이 분명했다.

F님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예상대로 너무나 당황하고 조금은 무서워하기도 했다. 내 생각은 변함없이 확고했기에 이렇게 말했다.

"F님이 진행해보세요. 막히면 언제든지 저에게 얘기하고, 전체적인 방향은 저와 주기적으로 맞춰요. 다른 디자이너들과 매주 미팅을 진행하되 저에게는 2주 정도에 한 번씩 진행사항만 말해주세요. 큰 방향이 흔들리지 않게만 조정하겠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위임했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자신감

꼼꼼하고 집요한 사람이 그러하듯, 초반에는 오버페이스로 준비를 하는 것 같더니, 실무자들끼리 정기적으로 미팅을 하며 어느새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팀장이 있을 때보다는 편안한 분위기여서였을까, 말랑말랑한 아이디어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F님의 자신감이 점점 차오르는 게 보였다. 말과 눈빛, 태도에서 뿐만 아니라 가져오는 작업물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팀장님, 요거 좀 보고 가실래요?"

퇴근 10분 전에 나를 불러 세우기 시작했다. 어떤 방향을 세웠고 그 방향의 근거는 무엇인지, 이에 따른 시스템은 이렇게 풀어내는 게 맞는 것 같다며, 자신의 직감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는 어느 때보다 견고했다. 물론 작업 방향과 완성도도 너무나 좋았다.


가장 자랑스러운 관계

사실 F님과는 가장 오랜 시간 일을 해온 만큼 상술한 것 외에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인생 첫 팀원이어서인지, 워낙 마음 깊은 곳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해서인지, F님과 함께하며 나 역시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입사 기념일마다 서로 전해주는 롤링페이퍼의 글씨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는 것도 좋았다. 첫 롤링페이퍼에서 왼쪽으로 한참 치우쳐있던, 자그마하던 글씨가, 어느덧 대지를 온전히 차지하는 크기의 글씨로 변하는 것을 보며, F님의 자아가 견고해지고 있는 것 같다-라는 뿌듯한 상상을 하곤 했다.


잠재력은 해방될 수 있을까? F님과의 긴 시간을 통해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적절한 자극과 꾸준한 지지, 무엇보다 완전한 신뢰와 위임이 주어진다면 분명히 가능하다고.

가느다란 목소리와 눈 마주치기를 어려워하던 첫인상. 그 밑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이 은근히 배어 나오던 사람. 나에게 F님과의 시간은 단순한 팀원 관리를 넘어, 한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 가는 여정이었다. 그 여정을 함께할 수 있었음에 깊은 감사와 경의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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