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기 짝이 없는 디자이너의 KPI 작성법

디자이너도 숫자랑 친해지고 싶어.

by 이드 쉐이퍼

본 글은, 2023년 신설된 성과평가 제도에 대해 고민했던 내용입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는 2022년 OKR를 잠시 거쳐, 2023년부터 KPI제도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디자인팀 팀장으로 일하고 있었던 터라, 숫자로 명확하게 증명되어야 하는 KPI 제도가 신설되며 팀원들과 함께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 팀의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고민했던 내용의 총집합입니다.

현재는 KPI를 기반으로 다양한 정성 평가제도를 보완하여 임직원 평가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KPI에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조금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브런치 첫 글로 선택하였습니다.

브런치 시작 전 네이버 블로그에 포스팅했었는데, (절댓값은 매우 적으나) 가장 많은 조회수와 공감수가 달렸던 글이기도 합니다. 저의 고민이 답답함을 느끼고 있는 분들에게 아주 작은 빛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2023년 초 등장한 KPI는 특히나 우리 팀이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난제처럼 느껴졌다. ‘디자이너의 KPI’는 아무리 구글링을 해보아도 예시를 찾기 어려웠는데, 그나마 찾았던 것들은 ‘시안 개수 늘리기’나, ‘제작 일정 단축시키기’처럼 개인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제안들뿐이었다.

숫자를 다루는 직업이 아니라면 업무의 성과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걸까? 마감 일정은 다가오는데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우선 GPT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도움이 될랑 말랑, GPT의 대답은 다른 질문을 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묘하게 겉돌 뿐이었다. 내가, 우리 팀이 KPI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긴 한 건지 먼저 짚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80%는 미달이 아니다. 진짜?

가장 먼저 80%라는 기준을 이해하려고 했다. 100점 만점에 80점이 아니라, 하고자 한 일을 완수하면 80%이 되는 거라는데, 영.. ‘미’를 받을 것만 같은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KPI 평가 기준에 대해 서치 했던 내용을 종합하여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해 보고자, 내 언어로 표현해 보았다.

업무 성과를 한 단어로 먼저 분류하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선에서 형용사를 사용하여 분류를 했다. (여기서 형용사는 색인의 역할을 한다. 이 경우에는 명도가 점점 짙어지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시각 구분 인자가 있으면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구체적인 예시가 필요하여 업무 상태 란에 예시를 작성했다. 적고 나니 상황은 그려지는데, 이것을 또 평가 기준으로 만들어야 하니.. 어쨌든 키는 ‘뚜렷하고 확실한 차등 포인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90의 근거가 필요하다

업무 목표(이하 과제) 별로 평가 기준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80에서 90, 90에서 100이 될 수밖에 없는 뚜렷한 차등점이 있어야만 한다. 자사 브랜드 리뉴얼이라는 과제로 80의 고과를 받았다는 것은 사전에 합의한 브랜드 리뉴얼 작업 리스트를 완료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 90은? 무엇을 얼마큼 해내야 80+a라고 말할 수 있을까?


디자이너가 사용할 수 있는 차등 포인트를 뽑아내야 한다

GPT의 대답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항목별로 조금씩 구체화를 해보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완료 시간을 사용한다면,
- 완성도 목표를 달성하면서 (80%)
- 원래 일정 보다 며칠, 일주일 단위로 빠르게 작업을 완료하여 사전 점검할 시간을 N일 확보했다.(90%)
고객/사용자 만족도를 사용한다면,
- 사내 회고 미팅을 통한 만족도 조사 N점 이상 달성 시 A%
- 임직원 만족도 조사 N 점 이상 달성 시 B%
- 고객 만족도 조사 N 점 이상 달성 시 C%
디자인 리소스 관리를 사용한다면,
- 업무 프로세스 구축하여 실제 사용 N회 이상(80%)
- 협업 관계자의 프로세스 만족도 N점 이상 달성(90%)
- 새로운 디자인 포맷 N개 구축하여 다양성 제공(80%) + 새로운 포맷에 대한 고객 반응(좋아요, 공유 수 등) 평균치 이상 유지(90%)
프로젝트 성과를 사용한다면, 각 콘텐츠의 기획 목표에 따라
콘텐츠라면 : 좋아요, 공유 수
기획전이라면 : 페이지의 유지율, 기획전 페이지에서의 구매 전환율
광고라면 : 클릭 수, 광고에서의 구매 전환율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애초 목표 자체가 수치 개선(클릭률, 전환율 등)인 경우를 제외하면,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 팀은 BX 디자인 업무를 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간간이 올라오는 패키지 디자인에 대한 긍정적인 리뷰나, 개인 잔디로 보내주시는 쑥스러운 칭찬들이 아니라면 디자인에 대한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창구가 없다고 생각했다. 브랜드 디자인 영역에서만 할 수 있는 브랜드 아키텍처를 위한 고민, 슬로건 제안과 채택, 실무자의 아이디어가 실제 작업에 반영되고 그것이 루틴 한 콘텐츠로 자리 잡는 등의 일을 성과화 하고 싶었는데, 다만 그 기준이 아주 명확해 보이길 원했다.


목록으로 나열한 것처럼 타인의 평가는 더 높은 고과를 목표로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0팀 00가 진짜 예쁘데요’, ‘제 친구가 갖고 싶다고 그랬어요’ 같은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들어 봤자 정량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하는 것이니, 그 결과를 세분화하여 차등을 주어야 하고, 결과를 보는(사용하는) 사람, 고객의 목소리를 실제로 들으며 업무에 반영해야만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직원 만족도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A 팀과 어떤 업무를 반복적으로 하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미팅이나 대화에서 A 팀이 불편하게 여기는 부분을 파악하고 이를 프로세스로 개선한다면,

80% : A 팀과의 1분기 업무 목표를 완료함
90% : 업무 목표를 달성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제안하여 리소스를 절감함

이렇게 차등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평가는 너무 무섭다. 성과 평가도 거북한데 성과 평가를 위한 평가를 받는다니. 머리가 아득해지지만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적어 두었다.

비교 인자가 없어 당연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평가 기준이 100% 정량적일 필요는 없다는 공지가 있었다. 팀 업무 중 정성적인 평가 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은 아무래도 시안의 개수나, 다양한 제안일 거라는 생각을 했고 이 지표를 함께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과제에는 뒷받침할 수 있는 시안 이미지, 미팅록, 아이디어 노트, 회고록 등의 첨부 문서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머리를 조금 굴려보는 것도

KPI에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건 가중치였는데, 스스로 선택한 과제에 대한 달성 가능성을 미리 점쳐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기준으로 설정하던 그것 모두가 평가의 기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전략적으로 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KPI 외에도 역량 평가라는 이름의 제도가 함께 신설되었는데, 평가자의 전문성, 태도, 가능성 물어보는 질문에 점수로 답을 하는 것이었다. 직무와 직책에 따라 KPI 평가 결과와 역량 평가의 반영 비율이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해 보자는 결심을 했다.


KPI 과제 개수는 총 3개 이상 5개 이하로 한다

1-2개 : 원래 하는 업무. 안정적으로 80%을 받을 수 있는.

1-2개 : 하기로 한 업무. 프로젝트 단위의 업무. 80%이 목표이지만 마일스톤을 설정해 볼 수 있는.

0-1개 : 도전해 보고 싶은 업무.


가중치를 활용한다

도전하는 업무는 하이리스크 하이 리턴일 확률이 높다. 여기에 가중치를 높게 두면 성과를 달성했을 때 돌아오는 것이 클 수 있다. 그리고 가중치의 패턴은 역량 평가 중 특정 항목에서 뚜렷한 평가를 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안정적인 업무를 반드시 넣을 필요도, 도전하는 업무를 반드시 넣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달성 여부이기 때문에, 본인의 성향과 팀의 성격, 회사의 기간 당 목표에 따라 충분히 고민하여 가중치를 설정해야 한다.


어쨌든 마음을 열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면 거북해지고, 거북하면 하기 싫어진다. 하지만 어쩌겠나! 해내야지. 이 제도를 통한 변화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상상해 보았다. 나를 위해서도, 비슷한 듯 제각각인 팀원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도 필요한 과정이었다.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자신이 세운 목표를 실행하고 달성하고 때로는 완성하지 못하는 과정을 통해 ‘실현 가능한 속도’를 습득할 수 있다.

실현 가능한 속도는 대중의 속도이므로, 이것이 습득되면 프로젝트를 팔로우하는 것도, 리드하는 것도 원활해진다.


제도는 활용하는 것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해내고 싶은 것을 항목 화하여 적고

이것을 차등 지표로 나누어 본 다음,

어떻게 믹스할지 고민한다.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태도가 경쟁력이 된다

태도는 평판이 되고 평판은 평가가 된다.

엄청 잘 해내는 것 위에는, 될 때까지 해보는 것이 있다. 중꺽마는 진리다.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에는 친절함이 담겨 있고 친절함은 가장 먼저 나에게 편안함을 준다.



제도를 분석하고, 이해하고, 유리한 지점을 찾아내려 아등바등 한 이 글은 ‘A 고과 이상을 받지 못하는 일 따위 나에게 일어날 수 없어’ 같은 치기 어린 다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KPI로 평가받고 있는 디자이너가 분명 있을 텐데 어째서 ‘이렇게 해 보면 되겠다’ 같이 한 줄기 샘물 같은 예시 하나를 찾기 어려울까 -라는 속상함 때문이었다. ‘KPI 고과 잘 받기’도 아니고 ‘작성하기’를 찾아봐야 하는 현실이 너무 막막했다.


나는 디자이너가 안으로 들어가 있지 않고, 다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고, ‘나서지 말자’라는 습관이 몸에 밴 채로 한구석에서 시들시들 앉아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들시들 해지기'가 업무 목표 라면 모를까, 왜 내가 선택한 직업 때문에 그런 모습을 당연시해야 하나?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끼리 걱정을 토로하고 의견을 나누는 장이 활성화되었으면 좋겠다. 넘볼 수조차 없이 화려한 - 이미 대성공한 - 분들의 강의를 듣는 것 이상으로, 지금 당장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정말 잘하고 싶은데 도무지 레퍼런스를 찾을 수 없는 다양한 과제에 직면해 있는 디자이너들끼리 말이다. 존재는 분명 느껴지는데, 만날 수만 있다면 아직은 조잡하고 어수선한 이 정리에 대해 함께 논의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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