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을 브랜드로 묶는다는 것

12살 디자이너, 4살 디자인팀 팀장에서 0살 브랜드팀 팀장이 되었다.

by 이드 쉐이퍼

‘팀장님이 브랜드 팀을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가벼운 아이디어 겠거니, 적어도 1년은 지나야 실행되겠지- 라는 생각이 무색하게, 변화는 1월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찾아왔습니다. 디자이너로서의 제 역할은 분명했지만, 이제는 브랜딩과 마케팅까지 바라보는 새로운 역할로서 저의 위치를 다시 정의해야 했어요.

예상치 못한 변화였지만, 뒤돌아보면 그 흐름은 꽤나 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를 통해 디자이너였던 제가 브랜드 매니저로 커리어를 시프트하며 겪은 실제 경험과 선택들에 관한 기록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순탄치만은 않았던 팀 합병 이야기 부터 시작해볼게요!


막연히 ‘언젠가 하게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덜컥 내 손에 쥐어지는 일이 생긴다. 준비가 되었던 되지 않았던 상관없이 덥석 내 손아귀에 쥐어져 예상치 못했던 온도에 손이 뜨겁거나 너무 차갑다 느낄 새도 없이 마치 알고 있었던 것인 양 태연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2024년 3월, 디자이너로 12년 동안 일해오던 내게, 어느 날 갑자기 '브랜드팀 팀장'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브랜딩과 마케팅, 그리고 원래 하던 디자인까지 맡는 통합팀의 리더 역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보다 두려움이 컸다. 디자인은 내 언어였지만, 마케팅과 브랜딩은 어깨너머로 어렴풋이 곁눈질만 해온 세계였으니.

당시 디자인팀은 나를 포함해 7명으로, 큰 이슈 없이 나름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반면 마케팅팀은 여러 사정으로 팀장 자리가 6개월 가까이 공석인 상황이었다. 실무적으로는 나와 직접적인 점접이 없었기에 점심시간이나 시간이 날 때 종종, 리더급에서 오갔던 이슈를 전달하거나, 대표님과의 소통에 대한 고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곤 했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니까,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을 브랜드팀으로 통합할 예정입니다. 팀장은 현 디자인팀장이 맡게 됩니다."


경영진의 결정이 전해졌고, 당연히 팀 분위기는 미묘해졌다. 변화 앞에서 사람들은 불안해한다. 특히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결정일 때는 더더욱.


'대표님이 알아서 잘 소통해 주시겠지.'

‘마케터 분들도 1-2년 서로 일 하는 거 봐왔으니까, 너무 걱정은 안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2주 정도 마케팅 팀원들의 의사 결정을 기다렸다. 하지만 분위기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결국 직접 소통해 보지 않겠냐는 대표님의 제안을 듣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업무에 대한 적응을 시작하기도 전에 겪어야만 하는 전초전이었다. ‘맷집 하나는 자신 있다 생각해 왔는데 이 건 또 새로운 일이군. 어쩌겠어, 해야지.’ 시뮬레이션만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일단 내던져져 보는 게 방법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 한 번 할까요

처음에는 가벼운 티타임을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회의 형식보다는 그냥 직원 대 직원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겼고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면 무엇이 걱정되고, 기대가 되는 점은 없는지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더 나아지게 위해 결심한 큰 조직적 변화가 감정만 소모되는 해프닝으로 사라져 버리지 않으려면 가볍고 또 솔직해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도 잠시, 한 톨의 오해 없이 투명하게 소통하려면 말보다는 글이 나을 텐데-라는 생각이 스치며 먼저 내 생각을 글로 먼저 정리해 보기로 했다. 떠오르는 대로 적다 보니 세상에나, A4 4장이라는 부담스러운 분량이 나오고야 말았다. 조금 줄여볼까 고민하다가 ‘모르겠다, 투박하고 그래서 쪽팔리더라도 이대로 가보자’라는 생각에 프린트한 종이 네 장을 들고 미팅룸으로 향했다. 편지(라고 쓰고 ‘입장문’이라고 읽어본다)에는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았다.


첫째, 이 상황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왜 이 역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

둘째, 내가 '추측하는' 상대방들(마케팅팀 팀원들)의 입장.

셋째, 내가 여러분의 팀장이 된다면 : 팀장으로서의 내 강점을 어필하는 내용.


두 번째 파트는 행여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이기에, ‘추측’이라는 점에 강조를 두어 조금 가볍게 전달했다. “너 같은 팀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네가 내 팀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었어.” 같은 소제목을 사용하여 나 또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또 공감하고 있다는 점을 전달하고 싶었다. 네 장이나 써왔으니.. 중간중간 웃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세 번째 파트에서는 디자인팀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알게 된 리더로서의 강점을 가감 없이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팀장 없이 업무 하던 분들에게 새로운 팀장이 생기는데 이 분야 전문도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감이나 리더십 같은 거라도 믿을만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강점이라도 명확하게 느껴져야 마음이 열리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20여분의 낭독이 끝나고, 너무나 극적으로도 박수가 나왔다. 앉아 있었는데도 다리가 휘청거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솔직하게 다가가야겠다라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사실, 이 분들 또한 합리적이고 솔직하게 소통하는 분들이라는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투박한 내 표현에 담긴 진심을 알아주고 ‘소통 과정에서 속상함이 꽤 있었는데 오늘 다 풀렸다.’, ‘이렇게 까지 저희 입장을 생각하고 계실지 몰랐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감정은 다 해소되었으니 그럼 이제 진짜 고민해 보겠다’라는 대답을 듣고 이틀 뒤, 같이 일해보고 싶다는 결정을 내려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새로운 팀의 역할과 조직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

총 9명의 팀으로 인원이 확정된 후에 나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 새로운 팀의 목표와 역할, 방향성, 핵심 To-do, 연간 목표 등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우리의 존재 이유와 좌표를 전사에 명시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깨달은 점은, '브랜드팀'이란 결국 브랜드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영역을 관리하는 역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역할이 기존에 존재한 적도 없었던 터라, 다른 부서와 매끄럽게 협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대내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브랜드 관리 팀 잡디 조사와 벤치마킹을 통해 브랜드팀의 역할을 정의한 다음, 기존 인원들의 역량과 직무를 바탕으로 조직도를 구성했다. 단순히 디자인팀과 마케팅팀을 합치는 수준이 아니라, 브랜드 전략(인큐베이팅), 브랜드 관리(매니지먼트), 브랜드 마케팅(커뮤니케이션)의 세 파트로 구조를 완전히 재편했다.

신규 채용은 먼 이야기였지만 조직도를 새로 만드는 김에, 각 파트와 직무의 자격 요건, 우대 사항들 까지 상세하게 작성해두었다. 채용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현 인원들의 직무에 대한 이해와 목표 설정을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이렇게 정리한 내용은 가장 광범위한 영역에 관여하는 새로운 팀에 대한 대내용 안내자료로 취합하여 사내에 배포하였다. 당시 두 분이었던 대표진의 브랜드 관리 조직의 필요성과 기대 역할을 정리하는 글을 시작으로, 팀 목표, 조직도, 파트별 업무와 관리 영역, 2024년 목표와 우선 프로젝트까지 명시한 PPT 자료도 제작했다.

이 자료는 팀원들에게는 소속감과 방향성을, 다른 부서에는 협업의 가이드라인을, 그리고 이후 입사하는 신규 인원들에게는 OJT 때마다 브랜드팀을 소개하는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덜컥 주어진 낯선 색의 책임감이 이제 조금씩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솔직함의 힘

이 과정에서 배운 점은 '솔직함의 힘'이었다. 기술적 전문성이나 지식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능력이 팀 통합의 핵심이었다. 잘 꽂히지도 않은 뭉뚝한 배지를 여러개 달그락 거려봐야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는 걸 체감한 순간이었다.

디자이너로서 12년간 쌓아온 경험은 의외로 큰 자산이 되었다. 사용자의 니즈를 이해하고 시각화하는 능력은 팀원들의 불안과 기대를 읽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을 그려내는 데 도움이 됐다.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하고, 유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기도 했던 그 경험이 이제는 서로 다른 팀의 입장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크다. 덥석 내 손에 쥐어진 책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진솔한 소통으로 상황을 헤쳐나가다 보니 어느새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막연히 언젠가'라는 꿈이 현실이 된 이 순간을 두 손으로 꼭 잡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