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怒), 하나 - 성(性), 못된 어른
유나(가명)의 어른들
상담, 사회복지,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청소년들을 만나고 가르치거나 보호하는 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어김없이 ‘화(anger)’, 즉 분노와 접하게 된다. 뭐 이 일이 아니라도 살아 있는 생애 동안 인간은 누구나 겪는 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 ‘화’의 근원이 되는 내용과 대상이 달라서일까. 아니면 그 강도가 종종 예상을 넘어서기 때문일까.
유나(가명)는 열다섯 살이었다. 앳되고 앳되어 이마의 솜털이 아직도 보송보송한 그런 아이였다. 특별할 것 없는 그런 집에서 나고 자랐으면 역시나 특별할 것 없이 그렇게 일상을 보내며 여느 소녀들마냥 웃고 철없고 수줍을 일 많은 그런 성격의 아이이기도 했다.
유나의 정확한 집안 사정은 알지 못한다. 도시와 떨어진 근교 지방 군소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할머니? 할아버지였던가? 두 분 다였던가? 여튼 부모와 지내지 않는다는 것만 알 정도였다.
유나는 청소년일시보호시설에 자주 들르던 아이였다. 당시의 청소년일시보호시설은 저녁 시간에는 문을 닫고 야간에 다시 문을 여는 형태의 운영을 하고 있었다. (예산과 인력의 문제였을텐데 지금은 다행히 공백 없이 운영 중이라고 한다.) 때문에 유나는 저녁이 되면 쇼핑백, 비닐봉투 등 무엇이 들어 있길래 저리 바리바리 이고 다니나 싶은 짐을 들고 일시보호시설을 나섰다가 그 짐을 그대로 들고 야간에 다시 일시보호시설을 찾고는 했다. 다시 일시보호시설을 찾는 날은 다행이었다. 유나가 일시보호시설을 찾지 않는 날은 돈이 있다는 뜻이었고, 돈이 있다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출처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랬다. 유나는 성매매 청소년이었다. 그 시작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시작해버린 것이 문제일 것이다. 성매매 경험이 있는 청소년 여자아이들은 그 굴레를 쉬이 벗어나지 못한다. 가출이 선행요인일 텐데 그 선행요인인 가정의 구성원들은 관심이 없거나 도리어 학대를 하거나, 아님 존재가 없거나(조손, 결손), 때론 자신들의 생도 어쩌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인 부모라서 방관할 수 밖에 없는 해결되지 않는 선행요인을 가득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밖으로 떠돈다. 밖으로 떠돌다 각자의 어찌저찌한 계기들로 성매매를 시작하면 그대로 독이 된다. 결심과 설득을 통해 청소년 보호시설 등에서 기거하며 아르바이트, 검정고시 등을 준비하지만 중간중간 생기는 고비를 버틸 힘이 없다. 기댈 등을 내줄 가족도 없고, 기관의 종사자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원가족에게 받는 지지와 다른 한계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예는 사실이기도 하다.
유나는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은 유나에게 힘든 날이었다. 유나는 생각보다 낯을 가려 그리 싹싹하지 못했나 보다. 가위를 가져다 달라는 손님에게 대꾸 없이 가위를 가져다 주었다. 손님은 기분이 당연히 나쁘다. 내 돈 주고 서비스를 받는데 뭔가 불쾌하다. 불편함을 지적받은 어쩔 줄 모르겠던 유나는 또 대꾸 없이 그대로 서서 손만 매만졌다. 사과 없는 태도에 손님은 사장에게 더 크게 불만을 얘기했고 유나는 그날 일이 끝나고 사장에게 격려와 질책을 동시에 받았다. 그날은 유나에게도 손님에게도 그리고 사장에게도 힘든 하루였을 것이다. 그렇게 청소년보호시설로 돌아와 몸을 아무렇게나 뉘이고 싶지만 집이 아니다. 정해진 규칙대로 씻고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겨우 자리에 누웠다. 힘들어 찾아간 당직 선생님은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지만 결론은 참고 견디라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집도, 책임져 줄 보호자도 없는 유나에게 힘들면 그만두라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호시설에서는 어떻게든 안정적인 거처와 유급 상태인 학적을 회복하는 것이 유나를 사회에서 더 이상 유리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이었다. 그러니 사회적 불리함을 지녀 배려가 두 배 필요한 유나에게 도리어 두 배의 결연한 의지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열다섯 여자아이에게 그것은 깨달아지지 않는 너무 큰 부담이다. 시설 종사자 역시 되지 않을 요구라는 것을 알지만 그것 말고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유나의 생각은 이렇게 다다른다.
‘내가 왜 이 돈, 이런 대우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데?’
때때로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고, 시급도 후려치며, 오늘같이 이런 일까지 있는 날이면 성매매 경험이 있는 유나는 온갖 부당한 대우와 처우를 견디며 아르바이트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지켜야 할 도덕적인 윤리의식도, 제 몸을 소중히 아껴야 할 자의식도 따스하게 배운 적 없는 까닭이다. 제 몸이 버려지는 몇십 분의 치욕이 매일매일 본인을 갈아 넣고 느끼는 좌절보다 낫다고 여기는 가치관이 먼저인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청소년 보호시설에 작별을 고하고 앞서 얘기한 짐 뭉치들을 잔뜩 손에 쥐고 거리를 다시 배회하는 수순이다. 이러한 불편에도 유나는 차라리 비행과 불법을 향하는 선택을 한다.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언젠가는 그만하겠다는 생각도 때마다 할 것이다. 그러한 생각이 결심이 되고 실행이 되기까지 유나의 배경을 바꿔줄 기적이 일어날까? 안타깝게도 그리 희망적으로 기대되지 않는다.
“유나야, 샘은 유나가 샘 딸이면 너무 슬프고 화가 날 것 같아. 이런 이야기들 많이 들었을 거고, 샘도 유나를 책임져주지 못할 거라 말뿐이지만, 진심으로 유나가 소중하고, 맑고 밝게 커갔으면 좋겠어. 그런 거 하지 말고......”
내가 뱉어 놓고도 참 답 없고 무책임한 이야기다 싶었다.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얘기, 맞는 얘기, 뻔한 얘기라도 해주는 어른이라도 되어줘야 한다.’
잠시 스친 생각은 정의일까, 합리화일까.
스치는 생각도 잠시, 유나의 말에 같잖은 감상이 깨졌다.
“샘, 나도 알아요. 잘못도 알고,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알고, 누가 하자고 해도 내가 안 하면 그만이고, 그래야 하고.......근데 당장 돈이 없어요. 샘한테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나라 탓도 안해요. 엄마, 아빠도 탓하면 뭐해요. 그냥 저는 포기했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저랑 자는 남자들도 다 저한테 샘처럼 말해요. 들어보면 맞는 말 해요. 저랑 자려고 만나면서요. 볼래요?”
그리고 유나는 자신의 휴대폰으로 채팅앱을 켜 소개 글을 적었다.
‘15세, 여, oo구 oo동’
채 1분도 되지 않아 말을 걸어오는(만나자고) 알림이 20여 개 이상 쏟아졌다.
“샘, 이 사람들 다 성인들이에요.”
입이 매우 썼다. 그리고 화가 났다. 그들에게도,
그들과 같은 성(性)과 비슷한 나이를 지닌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