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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Dec 18. 2023

노(怒), 둘 - 종사자[從事者]

업[業] 

종사자[從事者] : 어떤 일을 직업으로서 하는 사람.     


  직업을 가진 이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과 분야에서 종사자로서 전문성을 지닌다. 사회적으로 내로라하는 의사, 판사, 운동선수,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영역에서 대단하게 기능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가 편하게 살고 있다고도 믿는다. 내가 마트에서 장을 보는 것,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것, 음식을 먹는 것, 택배를 받아보는 것 등등의 수많은 일상들은 결국 자기 분야에서 그 일이 크든 작든, 선망이든 기피이든, 많은 돈을 벌든 박봉이든 치열하게 주어진 삶의 찰나들을 살아내는 이들의 덕이라 여긴다.   

   

당연히 내가 업[業] 으로 삼고 있는 상담, 복지의 영역에도 수많은 종사자들이 있다. 때때로 이들의 전문성과 직업정신은 존경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다. 나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소개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복지에 생을 갈아 투신하는 사회복지사, 자기의 경험보다 더한 공감으로 내담자의 상처에 진심으로 아파하고, 눈물조차 말라버린 내담자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상담사, 어떻게든 학생의 사회적 위치를 지켜내려 부모도 포기한 학생을 위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는 교사. 이들은 내 직업적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교본 같은 ‘분’ 들이다.      


그렇게 ‘업’은 내게 ‘벌이’를 주기도 ‘질책’을 주기도 한다. 고맙다. 돈도 벌고 삶도 견고해지는 경험은 앞서 언급한 많은 봉급생활자들에게는 신기루 같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그래도 나는 많은 선택권과 업무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다고 신입 때부터 여겨왔다. 때때로 죄책감이 드는데 사회인이 된 나와 클라이언트라 불리는 대상자들(내게는 주로 청소년이겠다.)의 삶의 진행이 비례하지 않는 부조리함 때문이다.     


나는 ‘업’으로 인해 돈을 벌고, 모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얻고 등등의 진행이 순조롭든 그렇지 않든 어쨌든 진행되었고 진행 중이다. 가출, 범죄, 비행, 위기, 학대 등에 놓인 수많은 청소년들을 살리고자 만들어진 사회적인 직업 덕택에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이들을 얼마나 살렸는가에 질문이 다다르면 가끔 ‘나는 지옥에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직업적 행위(일반적으로는 선행으로 보이기도 하는)가 물론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결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각종 제도나 기관에서 나를 통해 전해진 서비스가 분명 아이들의 삶에 긍정인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러니까 그게 내가 벌이를 받는 만큼의 기능이었냐 이다. 이쯤 되면 내가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지, 아이들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지 무색해진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은 보호의 틀에서도 꽤 구석진 사각에 밀려 있다.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부당함을 일반으로 여기고 사는 아이들도 태반이었고, 학습된 무기력에 학대를 권리보다 편하게 여기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이들이 권리, 부당, 의무 등에 대해 변별력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니까. 그런데 보통의 아이들은 그 변별의 후견인으로 ‘부모’라는 아주 든든한 산이 존재한다.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산이 없다. 허허벌판이면 그나마 다행인데 각종 장애물이 한가득이다. 그래서 나와 같은 사회적서비스 종사자들이 생긴 것일 것이다. 그들에게 산은 아니어도 언덕은 되라고. 그런데 언덕은커녕 종사자가 벽이 되는 일들이 있다. 분명히.  

   

일을 하며 동종업 종사자에게 화가 치밀었던 기억이 몇 가지 짚어진다. 소소하게는 비겁이다. 부당함을 항의할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은 때때로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자신의 당연한 권리, 순번을 놓친다. 그 짓을 종사자가 한다. 민원을 방지하기 위한, 민원을 받은, 드러나는 평가를 의식한 종사자가 그 짓을 한다. 아이들은 모른다. 권리 자체를 안내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겁은 주변의 비겁을 만든다. 동료애로 포장된 갈등의 회피나 조직의 역학관계 등에 따라 비겁에 눈을 감게 하는 비겁을 양산한다. 그러한 비겁이 미안해 클라이언트를 더 챙기기도, 비겁한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괴로워 양심이 가장 큰 소양이어야 하는 이 직업을 놓기도 한다. 누구의 문제가 아닌 내 문제이다. 우리의 문제로 여겨서도 안 된다. 그러한 현장에 내가 존재하는 한 해당 업종의 부조리는 내 문제이다.     


대상자 등의 정보보호를 위해 세세히 풀 수 없으나 내 손으로 직접 동료 종사자를 신고한 적이 있다. 당연히 대상자보다 동료가 더 친밀했다. 그런데 해야 했다. 그게 맞으니까. 당연하게도 그 동료와의 관계도 종말을 맞았다. 동료애의 부재, 매정함, 너는 그리 깨끗하냐....그러한 냉대와 평가 역시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이해도 된다. 왜 하필 내가 목격했을까 라는 괴로움도 없지 않았었다. 내 스스로의 괴로움도 고민도 난감함도, 그것도 이해된다. 나도 남도 다 이해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부조리, 부당, 부정 등 정해놓은 선을 넘었다면 반칙이다. 사회적 표현으로는 ‘범법’이라고 한다. 그 판단은 해당 업의 전문 종사자들이 한다. 내게는 ‘신고의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모를 일이다. 어느 누구도 업의 시작에 들어서며 스스로가 선을 넘을 것이라고 작정하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그랬다. 달리 말하면 내게도 언제든지 그 선을 넘을 가능성이 잠재해있다는 것이리라.      


이런 생각은 ‘업’에 대한 태도에 티끌만큼은 각을 잡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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