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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Dec 25. 2023

노(怒), 셋 – 가르치지 않아도 배우는 못된 짓

교도소의 부자(父子)

 가장 좋은 것은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잘못을 했다면 그에 대한 대가를 잘 치르는 것을 선호한다. 물론 겁이 난다. 업무적으로든 사생활의 영역인 일상에서든 잘못을 해 본 경험을 반추해 보면 대가를 치르는 것은 때때로 용기로 덮어지지만,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할 상황에는 정말 간절히 도망가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이것이 일반일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어.’


라고 말 할 수 있는 경우는 있겠으나


‘나는 잘못해 본 적이 없어.’


라고 말 할 수 있는 경우를 지닌 사람은 존재치 않을 것이다.


존재한다면 그는 나와 다른 차원의 존재(신이라 불리는?)이거나 안타깝지만 반드시 치료를 요하는 본인만 모르는 나르시스트가 분명하다.


나이가 마흔을 거뜬히 넘긴 나도 이리 잘못 앞에 의연치 못한데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잘못을 저지를 환경적 위험이 보다 높은 위기청소년 아이들에게 잘못에 대한 합리적 처신을 가르치는 것은 매우 지난한 작업이다. 때때로 원망을 사기도 하고, 사건과 별개로 아이들의 처지나 사정만 보여지는 외부의 매정하다는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쌍함’으로 낙인된 아이들은 본인의 처지를 이불 삼아 덮고 평생 ‘연민’을 동냥하고 구걸하는 삶에 처박히게 된다.


윤태(가명)가 그런 친구였다.


윤태의 사연도 역시나 기구하다. 윤태는 어머니를 모른다. 얼굴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어디 계시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교도소에 있다고 했다. 자신을 부모 대신 길러 준 고모를 통해 들었는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들었는지 모르겠는 아버지의 사연을 윤태는 자세히도 알고 있었다.


윤태의 아버지는 건설 현장,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가다 현장의 인부로 젊음을 보냈다고 했다. 윤태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으니 윤태의 아버지도 서른의 어디쯤에 닿아 있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이던 시절의 일이라 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설 현장이 그렇듯(그 시절의 현장은 더욱 거칠었으리라.) 윤태 아버지의 현장도 거칠고 고되고 술을 벗 삼아 고단함을 덜어내는 것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다른 날과 같은 어느 날이라 했다. 역시나 그 시절의 건설 현장에선 다반사인 시비와 욕설, 고성, 객기 등이 섞여 윤태의 아버지도 누군가와 그리고 그날의 사건과 뒤엉켜 뒹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결과가 매우 가혹했다. 윤태의 아버지는 자신이 저지른 일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취했었다 했다. 본인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조차도 다른 사람들의 진술에 따른 절차를 통해 확인했다니 말이다. 어떠한 변명을 가져다 댄다 해도 사람이 죽었다. 의도가 어쨌든 술이 어쨌든 사람이 죽었다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윤태의 아버지는 노동자에서 수형자로 이름을 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 했다.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착하구나 하며 다독였다. 아버지는 언제 마지막으로 뵈었는지 물었다. 기억에도 없다고 했다. 보고싶냐고 물었다. 뭐 그렇긴 하다고 안쓰럽도록 덤덤히 이야기했다. 어느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지 묻자 고모를 통해 들어 알고 있다고 했다.


어느 정도 날이 지나고 윤태와 아버지의 면회(접견)를 위해 교도소를 찾았다. 교도소 특유의 차갑고 텁텁한 분위기가 윤태에게도 간혹 교도소에 수감 중인 청년이 된 아이들을 보러 오는 나에게도 낯설었다. 접견을 위해 아버지의 수용 사실을 확인하고 접견신청서란에 관계를 적고, 짧지 않은 시간을 대기면서도 윤태와 나는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접견실에 같이 들어가지 않았다.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이곳에 오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기다리고, 아버지를 어렴풋이 기억하던 10여 년의 시간에 대보니 참 짧은 시간이었다.


그날 윤태의 기억과 느낌을 나눈 적은 없다. 다만 아들로서 참 잘했다고 다독였다. 아들 때문에 아버지는 지난 일을 더욱 성실히 갚아나갈 것이라고 격려했다. 윤태가 아버지와 다른 자유롭고 죄 없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맘으로 매 순간 참회하며 살 기회를 네가 아버지에게 준 것이라고 또 위로했다. 나의 바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윤태가 성인이 되고 어느날 찾아왔다. 탄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탄원서, 아이들을 위해 수도 없이 써 본 탄원서였다. 이유나 들어보자고 했다. 그냥 써달라고 했다.


“윤태야, 그래도 내가 뭐에 대한 잘못에 용서를 대신 구하는지는 알아야 빌든 뭐든 하지 않겠니?”


글쎄다. 정말 그렇게 여기는 건지 아님, 겸연쩍은 상황을 피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윤태는 변해 있었다. 재수가 없어서, 별일이 아닌데 커졌다는 듯 툭툭거리며 사건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보던 짓을 윤태가 했다. 여자아이에게 성매매를 시키고, 그 현장을 덮쳐 성매수자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 했으나 협박이 무겁고 겁이 났던 성매수자가 자수와 신고를 동시에 했다고 했다. 보통 쫄아서 돈을 주게 마련인데 그놈은 정말 쫄보라 도리어 잘못 걸렸다고 했다. 탄원서를 받는 것에도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듯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 태도 때문에 탄원서를 써 주지 않는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했다. 오해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도 생각이 들었다.


“윤태야, 벌 받자. 샘이 탄원서를 써 줄 수도 있는데 벌 받아야 할 것 같아. 샘이 벌을 주고 말고를 판단해서는 안 될 수도 있는데, 벌 받을 만큼 받고 이런 일을 다시는 안 했으면 좋겠다.”


“네, 뭐 그러세요.”


그조차도 별스럽지 않다는 듯한 대답과 인사를 두고 윤태는 갔다. 그 일 때문인지 그 일에 더한 다른 사건들이 보태진 건지 모르겠으나 또 몇 해를 두고 만난 윤태의 이야기에, 윤태가 아닌 상황에 짜증이 났다.


윤태도 복역을 했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계신 그 교도소에서 자신도 복역을 마치고 나왔다고.

그 말을 어찌 들으면 무용담처럼, 어찌 들으면 가벼운 에피소드처럼 이야기하는 윤태를 마주하는 것이 그때는 좀 그랬었다. 그러면서 또 그곳에서 종종 아버지를 보기도 했다는 이야기에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쳤다. 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회한을 느꼈을까? 아이러니하게 반가움도 느꼈을까?


벌을 받은 윤태가 사실은 깨닫고 있을 수도 있다는, 그저 태도가 저런 것 뿐일지도 모른다는 기대하기 어려운 바람으로 꽤 오랜 시간 내 스스로를 기망하며 지냈다. 그 기망은 실패했다. 남은 속여도 나를 속이는 것은 앞서 말한 나르시스트가 아니고선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통해 윤태가 무언가 배웠기를 원했으나 윤태가 아닌 내가 배웠다.


또 내게만 배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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