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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Jan 01. 2024

애(哀), 다섯 - 먹고살기 위해 죽어감

애달픈 직장인의 현대병

 직장인의 우울에는 답이 없다. 원인이 있을텐데 원인에 앞선 각자의 사정이 앞선다. 공황, 우울, 대인기피, 망상 등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주었다고 인정하지 않지만  받았다고 고통을 호소하고 괴로워하는 직장인이 분명히 있다. ‘존재하고 있구나.’ 하고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부지기수로 그 존재들이 여기저기 주변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일상으로 선명하게 체감된다.


이곳,


사람을 살리고자 상담과 복지의 영역을 담당하는 곳에서의 우울은 아이러니하다. 듣고 싶지 않은 교사 등 교육종사자나 사회복지종사자들(사회복지전담공무원을 포함한)의 자살이나 타인으로부터의 위해(危害) 뉴스도 일상이 된 듯하다. 누구나 그렇지만 해당 사건이 나의 업과 닿아 있는 이슈에는 왜인지 남의 일 같지 않게 씁쓸하고 우려가 앞선다. 나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겁’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때문에 상담이나 사회복지의 영역에 ‘업’을 두고 있는 사람들은 상호 간, 혹은 전문가에 의뢰한 ‘슈퍼비전(supervision)’이라는 것을 한다. 보통 업무 효율의 증대, 점검과 보완을 위한 피드백(feedback)이나 조언, 감독 등의 행위를 일컫지만 상담이나 복지의 영역에서는 종사자의 업무와 관련된(여기에는 필시 사람, 그 사람과의 관계까지 포함된다.) 정서와 심리상태까지도 슈퍼비전의 카테고리 안에 넣는 것이 일반이다.


문제는 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보다 ‘급하게’ 여겨지는 일들에 밀린다는 것이다. 어느 일이나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이 살고자 하는 일인데, 사람이 하는 일에 가장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사람으로 살고자 들어선 직업전선에서 사람이 죽어 나간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과정이 생략되거나 밀리거나 한 셈 치고 넘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슈퍼비전은 안타깝게도(나의 경험에 한정되겠으나) 매우 많은 부분에서 형식적이고 의례적으로 치러진다. 문제 발생을 막고자 만든 절차들이 문제 발생 시 해 놓았으나 불가피했다는 면죄를 위한 ‘담보’같이 쓰인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사실인 변명들을 접한다.


‘진단을 하고 예방을 하였으나 결과가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이 변명은 생명, 안전, 위생, 보안, 인권, 기타 등등 무수한 사건들에 딱지처럼 따라붙는다. 그러다 결과를 들여다보면 책임은 주체가 사라진다.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는, 실수는 있었겠으나 잘못은 없는 결과들은 문제에 따른 피해당사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러한 뉴스들에 대한 목격이 많아질수록 사람들은 피로감을 넘어 혐오와 불안을 철저히 경험한다. 이것은 분명 사회의 틈이고 균열이다. 그 균열과 틈은 서서히 조직과 사람을 잠식하기에 나와 내가 속한 집단과 사회, 당연히 그 안에 있는 나까지도 침착(沈着)되는 것을 모르고 잠겨간다. 마치 매일매일 소량의 독으로 일상은 가능하되 기필코 명(命)을 재촉하듯 말이다.


이 현장에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궁극의 목적이 있으나 사람에게 가장 큰 혐오를 경험하는 당연한 아이러니가 여전할 것 같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혐오는 동기와 결과가 다양하다. 대상 또한 다양하여 동료, 클라이언트, 업계관계자, 자신에게까지 이르기도 한다. 자칫 그 타격은 애먼 가족이나 자녀들에게 치명적으로 전가되기도 한다. 책임에 대한 전가가 아니라 결과에 대한 전가이다. 그 결과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담기에 많이 무겁다. 원망, 분노, 고발, 험담, 자책 등을 가장 경계하고픈 사람이 그것들에만 휩싸일 때 다른 이를 해치거나 스스로를 해치는 결과를 내기도 한다.


 수많은 감정노동자들이 앓고 앓다가 산화(散華)하듯 사그라든다. 때때로 이유가 불분명한 불안에 휩싸일 때면 그들의 내적 질병에 내가 보탠 것은 없는지, 그들의 문제에 내가 나도 알지 못하는 무심결에 던진 돌은 없는지, 그렇다면 내가 그 죄를 감당은 할 수 있겠나 등등의 실체 없는 사념(思念)으로 괴롭기도 하다. 누구도 지적하지 않은 잘못에 대한 과다한 두려움은 살펴보면 나 역시 이곳 직장에서 세월을 보내며 겪은 덮어놓고 치워버린 사건, 감정들의 산물일 수 있겠다 싶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티가 나지 않아 몰랐을 뿐.


그 티 나지 않게 직장인을 병들게 만드는 문제들은 티 나는 증상들로 발현된다.


티가 나지 않도록(왜냐하면 내가 생각해도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부던히 노력하고, 몰래하고, 아닌척하지만 내게도 강박이 있다. 불안이나 초조가 덮치면 상황에 건실히 대응할 때도 물론 있으나 그에 못지않게 강박적 행동을 미친 듯이 반복하기도 한다. 나는 ‘확인강박’을 통해 초조를 조절하려고 한다. 수십 번도 더 물이 잠겼는지 확인하느라 수도밸브를 하도 힘주어 눌러 부러뜨리기도 하고, 지각을 감수하고라도 가스밸브가 잠겼나 다시 집에 돌아가고, 수화기가 잘 놓였는지 들었다 놨다를 수십 번 반복하고, 이체를 잘 했는지 확인을 하고도 수십 차례 다시 계좌를 확인하고.


그 정도 강박은 현대인들은 누구나 있지 않느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들여다봐야하는 부분, 놓치지 말고 챙겨볼 부분이 있다. 강박을 포함한 불안을 다스리려는 행위들은 대부분 일상을 좀 해친다. 정도가 깊다면 앞서 이야기 했듯이 티 나지 않게 병들어가다 보다 일찍 종말을 맞게 되는 결과를 낸다. 그것은 목숨이기도 하고, 직장이기도 하고, 학업이기도 하고, 관계이기도 하고 우리의 생을 채우는 모든 것들에 상실을 야기하기도 하는 좀 무거운 증상이라고 나는 본다.


 강박을 통해 불안을 다스리려다 도리어 이 강박을 조절치 못해 일상이 무너지거나 강박으로 조절되지 않는 불안이나 사건 앞에서는 더 큰 자극이나 극단으로 스스로를 모는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고, 그것이 그저 사회현상의 한 부분인 듯 지나가는 사회에서 나는 좀 무섭기도 하다. 내 문제로 드러날 때도 역시 그렇게 지나가질지 모른다는 불안일까. 모르겠다.


조금 가볍고 건조했으면 좋겠다. 비만은 위험하니 감량을 권하듯이 우리의 정서도 조금 가벼워지길 바란다. 내 몫이 아닌 감정과 사건의 부산물들을 끼고 살지 않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른 이의 감정이나 정서, 마음, 사건도 가볍고 건조하게 지나쳐주길 원한다.


애정하는 사람은 애정 그대로 가볍고 즐겁게,

불편한 사람은 깊지 않은 적당한 건조함으로,

적어도 정서적으로는 밀어낼 수 있기를.


그래야 ‘곰팡’이 안 핀다.


우리 생에 피어야 할 것은 각자의 이름을 가진 씨로부터 시작된 ‘꽃’이리라.


명대로 살 이유가 분명한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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