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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Jan 08. 2024

애(哀), 여섯 - 가난한 아버지의 아픈 아들

광호(가명)의 이야기

 가난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당연한 순리에도 죄책감을 부여한다.      


가난한 부모는 자식에게만 미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으로 덮어지지 않는 자녀의 필요를 채울 때, 그 대상이 누구든(사회든, 제도든, 이웃이든, 친인척이든, 남이든)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말은 그렇다. 그러나 어떤 것보다 가난은 잘못 없이 받는 처벌이 적지 않다.) 죄인마냥  머리를 조아리고 가르치지 않은 부끄러움과 수치를 대가로 치른다.      


 ‘인간들의 세상은 참 신기하다. 칫솔을 따로따로 쓴다. 오늘 선생님께서 칫솔은 따로따로 써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 새로 배웠다.’     


광호(가명)의 일기 내용이다.

광호는 이런 엉뚱한 생각들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달고 살았다. 더불어 어디서 누가 보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환청들에 시달리곤 했다. 이런 광호를 상대하는 일은 어려운 작업이었다. “몇살?”라고 물으면 “외계인 침공”이라고 대답하는 광호였다.     


광호는 내 사회 초년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이런 광호의 모습은 어렸을 적 앓은 열병(쯔쯔가무시)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과거의 모습들보다도 광호가 더욱 안타까웠던 건 그를 돌볼 여력이 되지 않는 가정, 그리고 부모였다. 광호는 형이 자꾸 때려서 가출을 했다고 했다. 처음엔 이런 동생을 때리고 싶을까 분노했으나 그것 역시 광호의 망상 중 일부인 것을 알고는 섣불렀던 분노로 잠시 미웠던 형에게 미안했다.

     

어떤 물리적 표현 등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나 나는 분명 심정적으로 한 사람을 섣부르게 내적 심판 했다. 감정이 앞선 판단은 나의 미성숙이지만 그 감당은 오해받은 대상자의 몫이다. 조심해야 한다.      


광호는 작은 꾸지람도 극심한 공포로 받아들이곤 했다. 광호의 형 역시 어려운 가정 형편에 중학교를 채 마치지 못한 채 석재를 깎는 석공 일을 하며 부모의 품에서 자랄 수 없는 광호를 홀로 돌보고 있었다. 일을 하러 나가면 본의 아닌 방치가 되었고 이런 형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곤 광호를 방에 온전히 가두어 두는 것이었다. 부모님 역시 종교단체 시설에서 생활할 정도로 자립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처음엔 광호의 아버지 역시 광호처럼 지적장애 등의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어눌한 어투로 전화를 받았었다.(형을 그렇게 섣부르게 판단해놓고 단지 어눌한 말투로 아버지도 섣부르게 판단해버린, 그 당시의 나는 그렇게 어리고 어리석은 사회 초년생이었다.) 어머니는 늘 목이 쉬어 의미조차 해석이 되지 않는 말이 아닌 그저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런 부모에게 광호에 대한 자원이 되어달라고 하는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다. 광호에게 지지가 되어 줄 여건이 없다면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사회적 혜택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알아보기 시작했다.(사회초년생이기에 할 수 있는 무모한 일이기도 했었다.) 초기 목표 설정 때 여러 가지 생각들과 혼란들, 그리고 실무자들 간 의견 차이가 다소 있었다. 그러다 장애인 시설로 연계하려 했으나 역시 쉽지 않았다. 누구도 광호에게 복지카드 발급을(정확히는 장애진단) 해 준 적도 해 주려고도 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광호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광호가 살았던 연고지의 면사무소 사회복지사를 통해 광호의 정확한 가정, 생활환경 등을 수시로 물었고, 어눌한 말투이지만 광호에 대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던 아버지의 진심의 말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기 시작했다.광호와 주기적으로 시간을 정해 상담을 하고  다른 문제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광호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샤워실에서 면도기로 자신의 다리 털을 모두 깎아내다 생긴 보기에도 쓰라린 상처를 보며 나의 부주의함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정신분열, 성정체성 혼란, 지능발달 미진........     


광호가 가진 장애는 광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만큼이나 복잡하기만 했다.      

광호에 대한 사정이 끝난 후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장애 등록을 해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장애’      


그럼에도 나 역시 그 장애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장애인 등록을 하는 순간 광호는 정말 장애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왜 그리 무서웠을까 싶다. 아마 당시의 사회 분위기, 아니 내가 가진 장애에 대한 편견의 값과 비례했던 것이라 여긴다.  여하튼 당시의 첫 작업은 정신과 병원 진료였다. 지능검사, 사회성숙도 검사, 뇌파검사, 그리고 답이 없는 정신과 상담들이 지루하리만큼 오랜 기간 이어졌다. 그런데 웬일? 결론은 장애진단 불가, 다행인가 싶었으나 화가 났다.    

 

‘그럼 도대체 누가 장애 진단을 받는다는 말인가?’     


멀쩡한 인간들이 장애인이랍시고 군대를 기피하는 시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장애인인 척 장애인 주차장에 떡하니 차를 대고 두 발로 멀쩡히 걸어 다니는 정신머리가 썩어빠진 양심의 장애인들에 밀려 혜택을 받아야 할 광호가 잃게 될 것들에 화가 치밀었다.     


수 차례 검사를 의뢰하고 또 의뢰했다. 필요하다는 검사는 허락되는 한 다 했다. 기나긴 공방 끝에 상담이나 심리검사 등을 통해 드러나지 않던 것이 CT 촬영을 통해 뇌 부분에 문제가 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다시 지속적인 상담과 치료, 재검 등을 통해 지적장애 3급(당시에는 정신지체라는 용어였으나 지금은 표현이 바뀌었다.)진단을 얻어(?) 낼 수 있었다.      


근데 또 마냥 기쁘지 않았다. 왠지 내가 광호를 장애인으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외람되지만 나는 장애의 혜택보다 비장애인이라는 자녀의 이름표를 어떻게든 지켜내고픈 부모들의 간절함을 무지나 오기로 치부할 수 없다. 남인 나도 이런 맘인데 내 속에서 나온 내 피붙이의 일이라면 얼마나 오만가지 생각이 싸우겠는가. 너무도 명확한 타인의 헛된 희망이더라도 나는 누구의 기대를 침해하고 싶지 않다.   

  

장애등록이 된 광호의 다른 작업들이 필요했다. 광호를 전문적으로 치료하고 보호해 줄 시설 섭외가 우선이었다. 수소문했지만 입소 인원에 걸려, 비용에 걸려, 장애인 학교는 나이에 걸려 난색을 표했다.

난감하고 막막하던 차에 선배 실무자가 작은 리플렛(홍보지) 하나를 건네며 격려해주었다.

장애인 공동생활 가정. 이미 실패를 거듭한 터라 이번에도 별다른 기대 없이 기관에 연락하고 방문했다. 작고 아담한 일반 주택에서 대여섯 명의 각각의 장애를 가진 장애인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지적장애, 시각장애, 뇌변병. 연령대도 이유도 사연도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더없이 다정한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안심되는 설명과 광호의 사연에 대한 공감에 그땐 내가 위로를 받았다.


그럼에도 문제는 역시나 돈이었다. 열악한 시설의 운영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입소생활비가 필요했다. 그 고민으로 또 며칠을 뒤척였다. 다시 광호의 연고지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광호의 기초생활 수급 상태에 대해 물었다. 광호를 포함해 광호가족의 당시 실수급비가 40만원 가량이었다. 광호 몫의 기초생활 수급비용을 떼어 입소를 하게 되면 광호의 부모님 두 분이 받게 될 혜택은 절반가량 줄어든다고 했다. 이 말을 부모님께 어떻게 전하나 또 며칠 속이 시끄러웠다. 그리고 어렵사리 광호의 아버님을 기관으로 모셨다. 동의하셨다. 슬펐다. 그리고 답답했다. 무엇인가를 온전히 혜택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죄송스러웠다. 광호의 아버님이 사 들고 오신 음료수의 값어치를 알기에 감히 손대기가 또 죄스러웠다.


광호의 입소가 결정되고 절차를 마친 후 광호, 그리고 광호의 아버지와 입소를 위해 기관을 찾았다. 광호의 사연들에 당시 기관의 아이들도 생각하는 바가 많은 듯 했다. 절도, 폭력, 성범죄 등 자신의 잘못으로, 때로는 학대 피해 등 타인의 잘못으로. 그렇게 다양한 이유들로 이곳에 입소한 아이들이었지만 그 아이들 역시 얼마 되지 않는 짧은 생애가 상처투성인 녀석들이었다. 상처로 아프고 남을 아프게 했던 놈들이 적어도 그때만큼은 광호를 안아주었다. 사회 초년생의 열정이었는지 감정과잉이었는지 당시에는 그 모습에 좀 울컥했었다.  

   

광호가 입소하던 날, 입소서류조차 제대로 작성을 할 수 없어 내 손을 빌어 입소절차를 마친 광호의 아버지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하지만 정성스레 챙겨오신 만짜리 스무 장을 내어놓으셨다.    

  

‘저 돈을 모으려고 얼마나 애닳고 애썼을까’      


그 조마조마했을 아버지의 시간을 생각해보니 입소 비용은 현금으로 그렇게 내는 것이 아니니 걱정 마시라고 안내를 못해드린 것이 너무 죄송했다.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이들에게는 일반적이지 않다.     

 

당연히 알 것이라 예상되는 정보나 상황도 나의 경험과 학습에 따른 섣부른 편견이다. 내 기준이 아닌 대상의 기준에 맞추어 상황과 절차, 입장을 생각해야 한다. 다른 사람(광호의 아버지)에게 값을 치르게 하고 내가 배운 교훈이다.      


그렇게 광호는 더 적합한 곳으로 보내졌다. 광호를 뒤로하고 광호의 아버지와 말없이 차를 타고 돌아왔다. 곁눈질로 보이는 광호 아버지의 잔주름 가득한 눈가에 내가 서글펐다. 어린 자식을 책임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한과 안도감도 읽혔다.     


터미널에 광호의 아버지를 내려드리고 차를 출발하려는데 허겁지겁 캔 음료 하나를 손에 들고 혹시나 내가 출발했을까 뛰어와 기어코 차에 음료수를 밀어 넣고 돌아서는 광호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터져버린 울음에 한참을 핸들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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