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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단 Jan 15. 2024

노(怒), 넷 - 빈곤포르노(자극의 시대)

자극을 자극하는 차별의 보상

‘존경과 경건함 없이 굶어서 배가 부푼 아이들을 광고에 공개하는 것은 포르노’ 

 외르겐 리스너 


나 역시 같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글을 쓰는 정확한 목적은 무엇일까? 이 글을 통해 아이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를 진정 기대하는 것은 맞나? 아이들의 삶에 내 삶을 끼워 아닌 척, 겸손인 척 그러나 교묘히, 그리고 반드시 드러나길 바라는 나의 치적(?)의 그럴싸한 공개를 위해 협잡을 부리는 것은 아닐까? 


자신할 수가 없다. 


그리고 기억되고픈 나의 기대(?)가 더해진 왜곡이나 과장이 글에 덧씌워지지는 않았나? 이 또한 자신할 수가 없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는 결국 아이들의 삶에 대한 공개이기에 가명을 썼든 모자이크를 했든 불가피하게 전시(展示)성을 띤다. 


외르겐 리스너의 말처럼 나는 아이들의 삶에 대해 존경과 경건함을 가지고 있는가? 아이들의 삶, 사연을 팔아(금전과 같은 물리적인 이익이 아니더라도 글을 통해 얻게 되는 무형의 가치들이 있다면 이 또한 소득이라 여긴다.) 나의 충족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구호를 위해 가난이나 처지에 대한 공개는 때때로 불가피하다. 그러나 종종 그 처지는 지나치게 깊게 공개되거나 실제보다 굴곡지어 보여지게 된다. 그리고 그 공개에 있어 당사자인 클라이언트들은 주인공이 아닌 단역으로 존재할 때가 훨씬 많다. 실제적인 이익을 위해 그 이상의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마치 한 장면의 출연이라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종일 추위에 떨다 겨우 자신의 차례가 왔으나 그조차도 카메라 앞에서 최선을 다해 주인공을 빛내주기 위한 엑스트라처럼.


사회복지 현장에는 많은 구호(救護)가 전달된다. 내가 잠시 몸담았던 아동양육시설도 그랬다. 금전이기도하고 물건이기도하고 사람이기도하며, 재능이나 마음이기도 하다. 실제로 아이들은 이를 통해 경험치 못한 것들을 채우기도 하고, 부모만큼은 아니겠으나 마음으로 전해지는 따듯함을 받기도하며, 때로는 친척처럼 왕래하는 사회적 후견인이 생기기도 한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부모자식의 연을 맺고 법적으로 묶이는 다행스런 확률을 높이는 것도 구호의 장면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구호는 반드시 필요하다. 이것은 가난, 결손, 조손, 장애, 차별, 학대, 고독, 노화, 전쟁 등 인간사에 없으면 좋겠으나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에 대한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수반된다면 정치든 제도든 한 개인의 마음이든 구호나 구휼(救恤)은 무엇보다 고결하고 신성하다. 반대로 진정성이 결여되는 순간 구호나 구휼은 폭력이 된다.


아동양육시설은 어느 복지 현장보다 구호의 장면이 많다. 그만큼 대중에 대한 아이들의 공개가 많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동들은 아직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다 이해할 만큼 자라지 못했다. 더군다나 잃어버려졌든 버려졌든 상실을 크게 겪은 아이들이라 본능적으로 눈치를 본다. 주지 않은 눈치조차도 만들어 보는 아이들이다. 안타깝게도 어떤 장면에서는 그것에 스스로를 잘 적응시킨 아이가 사랑받는 아이가 되기도 한다. 


시설의 종사자들에게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들의 근로현장은 아이들을 돌보기에 적절치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종사자 한명 당 학령기로 구분지어진 10여명에 가까운 아이의 생활 전반을 책임져야한다. 내 속에서 나온 내 아이 한둘도 하루 종일 챙길 것이 수도 없고, 그도 다 못 챙기는 것이 일반인데, 10여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오죽하겠는가? 2교대 형식의 근무는 1주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며, 그 1주를 반으로 나누기도 한다. 새벽에 눈떠 다시 새벽에 잠들기 전까지 종사자들은 쉴 틈이 없다. 그에 더해 정서적 긴장감을 놓기도 힘들다. 그러다보니 내가 몸담았던 당시의 아동양육시설 종사자들의 근속률은 참혹했다. 물론 그 시설에 한정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설도 결국은 현장이다. 그러한 현장이 분명 존재한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쨌든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근로현장의 어려움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아이들의 인권을 챙겨야하는 종사자들에게 사고(思考)의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챙겨야하지 않냐고 채근한다면 좀 억지스럽지만 잠도 자면서 책도 보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물론 종사자들의 처우개선이 아이들의 삶의 개선에 선제조건은 아니나 불합리한 처우나 근무 조건은 반드시 아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날인가 지역의 명문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학습봉사를 온 적이 있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바른 자세와 명문고 학생들다운 당당함이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어주는 그림이었으면 아주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모두 자신의 부모 중 한사람과 함께였으며 시설의 운동장에 줄지어 서 있던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들은 이 곳 아이들의 처지와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시설의 아이들은 그들의 봉사를 위해 무리지어져 시설 곳곳의 장소들로 옮겨졌다. 일부일지 모르겠으나 봉사활동을 온 아이들의 부모들 중에는 봉사활동을 왔는데 부모들이 제대로 앉을 곳도 없다는 둥, 봉사활동 시간은 명확히 입력이 되는거냐는 둥, 봉사활동 입력 담당자는 누구냐는 둥 그날 저녁의 분주함이 아니었다면 짜증을 낼 지도 몰랐을 서슴없는 말들을 쉽게 내어 놓았다.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부모라는 환경의 상실이 원인이 되어 이곳에서 어쩔 수 없이 사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등장부터 퇴장까지 조금은 달랐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봉사활동, 내 새끼의 이력의 한 부분, 깊게 생각되어질 필요가 적은 사각의 아이들. 이러한 무심한 태도들은 보이지 않는 결과들을 낸다. 그 무심한 태도는 시설의 아이들에게 불필요한 사회에 대한 불신을 양산하기도 한다. 내가 한번 스윽 지났던 봉사활동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자위가 그곳의 아이들에게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즉 내가 한번 준 상처를 아이들은 늘상  받기도 한다는 이야기다. 


시설의 아이들은 자유나 자율성이 매우 제한적으로 허락된다. 누구나 독립적이고 사적으로 처리되어야 할 여가나 주말 역시 이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심지어는 원하지 않는 봉사활동을 받기 위해 시설에서 대기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어디서 봉사를 오니 나가면 안 된다.', '오늘은 누가 너희들을 위해 멀리서 오시는데 그러면 되겠느냐' 등등. 


그 뒤로 내 봉사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봉사는 철저하게 클라이언트의 욕구나 처지를 이해하고 시작할 일이라고 말이다. 봉사라는 것이 하고 싶어 내가 원하는 시간, 내가 원하는 방식, 내가 원하는 반응을 이미 전제하고 클라이언트의 구제보다는 봉사하는 나에게 취해 내가 그 상황의 주인공이 되어 클라이언트들을 엑스트라로 만든 것은 아니었는지 복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왜 시설에서는 봉사를 받느냐고? 왜 경계하지 않느냐고? 그렇지 않다. 그 작업이 있다. 그래서 자원봉사자 교육도하고 점검도 하고 때로는 정중히 사양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작업이 매번 이뤄질 수는 없다. 그리고 그 작업이 늘 명확히 진심과 허심을 구분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 안에는 오해해서는 안 될 진심이 분명 있고, 왜곡되어서는 안 될 마음이 분명히 있으며, 반드시 전달되어야 하는 현실적인 도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렇더라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한다. 열 번 진수성찬이기에 열에 한 번은 상한 음식이어도 감수해야하는 건 어느 누구에게도 온당치 않다.


빈곤을 팔아먹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이것은 빈곤의 현장에서 직접 종사하는 이들이 경계할 몫이다. 

그러나 구호의 이름을 걸고 빈곤에 적당한 가격을 매겨 공명(功名)을 위해 매수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더는 없기를 원한다. 이것은 그들을 돕고자 하는 진실 된 봉사자들에 대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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