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樂), 하나 - 소소하게 평범하기
평범을 쫒아가는 비범한 아이들
초중등 학령기의 나를 돌아보면 나는 내가 특별해질 것이라 생각했다. 특별해질 것도 없이 이미 특별하다고도 생각했다. 청소년기 아이들의 자기인식이 다들 그렇듯 나 역시도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굳건히 믿고 있던 ‘개인적 우화’의 시기를 철저하게 잘 따라 자란 모양이다. 당시에는 스스로를 매우 특별한 존재로 인식했겠으나 그러한 상태였던 걸 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기를 잘 지나왔다는 확인이기도 하겠다.
청소년기의 이런 적당한 망상은 진로에 적잖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실제의 내가 열 번의 성공밖에 하지 못한다 해도 나는 백 번을 성공할 것이라는 망상은 삶의 과제 앞에 적어도 오십번 이상의 도전을 시도하게 하는 무모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한도치를 초과한 그러한 시도는 때때로 열 번 이상의 성공 경험을 낳는다. 이는 점차 자의식이 객관화되고 자기 조망이 될 시점과 맞닿으면 스스로를 격려하고 능력치 이상의 결과를 다시 기대하게 하는 선순환을 체득(體得)케 한다.
이것이 나를 포함한 우리가 평범하다라고 인식하고 일컫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의 일반이다.
그 환경에는 그렇게 철없이 무모해도 안전한 가정과 부모, 학교, 아이였던 내가 속한 사회가 배경으로 존재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철이 일찍 들거나 철이 들기 전 자신의 환경을 뼈저리게 객관적으로 직면한 아이들의 삶은 아프다. 정확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어느 드라마에선가
‘철이 일찍 들어버린 아이들은 모두 불쌍해.’
였던가, 무튼 비슷한 맥락의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은 포기도 빠르다. 눈치도 빠르고 아직 필요치 않은 주제 파악(좀 맘에들지 않는 표현이지만)도 빠르다.
‘내가 공부를 해도 집에 돈이 없어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다.’
는 우려 정도가 아닌
‘내가 공부를 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라는 자기 비하, 혐오로 나아간다.
철이 든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청소년기의 미숙함은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에 자기 선에서 취사 가능한 생존의 방식을 선택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 일탈적이거나 일탈을 부추기는 비행의 선택지를 받아 들 때가 많다.
그래서 가정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도리어 가정을 지탱해야 하는 아이들은 성매매 등에 자신의 가치를 맞바꾸거나, 무면허 오토바이 배달 등에 자신의 신체적 위험을 담보로 맡기기도 한다. 당연히 범죄소년이 되거나 장애를 입거나 할 확률이 확연히 확대된다.
이 모든 것이 해당 문제를 지닌 청소년 개인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다. 사회적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다. 가난을 써 붙이고 다니는 아이들도 없고, 비교적 외모에 관심이 많은 시대의 청소년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그나마 외모에서는 차별적인 요소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굳이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다행이지만 때때로 그들의 사정이 고려되지 않은 판단과 평가로 이어진다. 물론 아이들의 일탈과 비행에 어떠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고 앞으로 개선, 선도되어야 할 아이들 본인 뿐 아니라 환경이나 사정이 배제된 채 판단되기 일쑤다.
그래서 같은 선에서 출발하지 못했다는 사정은 일몰되고 같은 선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결과만 떠오른다. 당연히 결과 앞에 아이들은 ‘모자라거나 불량하거나 못 배워먹은’ 등의 딱지를 받는다.
나는 사람의 선함을 믿는다. 시간과 여유, 안전이 주어진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러한 아이들의 사정을 아우를 것이라고 나는 분명 믿는다. 지금의 시대는 어른이 된 많은 우리에게 그 시간과 여유,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부족한 시간과 여유, 금전적 불안, 고용의 불평등, 차별의 일상화에 침착된 우리 어른들은 불안정한 남의 아이들을, 그 아이들의 사정을 아우를 여유가 없다. 도리어 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안 요소로 더 크게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더더욱 내 아이와 그 아이들을 분리하고 가르고 밀어내는 부정적 동력이 될 때가 많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해 보면 위기청소년 아이들이 평범을 지내는 것은 얼마나 대단하고 가치 있는 일인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그러한 아이들이 또 있다. 하찮아 보이는 최저시급 아르바이트를 하며 업주나 고객의 칭찬과 격려를 생의 몇 번 없던 지지의 경험으로 귀히 여기는 아이,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일찍이 육가공 업체에 취직하여 10여 년의 세월을 우직하게 지내며 고시원에서 월세로,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공공임대로 차근히 삶의 내용을 채워가는 아이, 성매매 등의 일탈을 기어이 끊어내고 미혼모로 살면서도 아이를 키우며 정당하게 돈을 벌기로 작정한 아이, 그런 아이들을 보면 그저 고맙고, 때때로 감성이 터진 날에는 주책맞은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눈에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아이들을 존경한다. 정말 존경한다. 그 평범은 나의 비범과도 댈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평범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내 눈에 평범이지 아이들에게는 인고의 시간을 지난하고 치열하게 거친 대망의 결과이다.
앞서 주책맞은 눈물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울 일이 종종 있다. 학교에 복학하기로 결심한 아이, 청소년증을 발급받은 아이, 수능이나 거창한 이름의 고시 등이 아니라도 무면허는 불법이니 원동기 면허 취득을 위해 공부를 시작하는 아이, 내 자식에게는 그저 소소한 일처럼 보이는 위기청소년 아이의 건전을 다짐한 설레는 이성 교제, 스스로 번 돈으로 선물과 용돈을 준비해 장애를 지닌 부모를 찾아뵙겠다는 아이, 그밖에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평범히 그냥 지나치고 때때로 무료하게까지 느끼는 아이들의 일상이 나는 눈물나게 감격스럽고 희열에 소름이 돋기도 한다.
내가 감히 가늠치 못하는 자신의 시절을 이 아이들은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지해야 한다. 나는 그래야 한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아이들의 성장과 변화를 가늠하고 아이들의 사례를 성패(成敗)로 구분했던 내가 부끄럽다. 어디 감히 다른 이의 생에 성패(成敗)를 논한단 말인가. 역시 나도 아이들이라고 함부로 재단(裁斷)했다고 밖에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생각들과 나름의 반성들이 지난 후부터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이, 평범한 그들의 비범이 나는 즐겁다. 충분하다. 그렇게 아이들이 끊임없이 평범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평범해지는 아이들의 소식을 들으면 그땐 나의 일과 생에 보람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문처럼 늘 하는 말이 있다.
“즐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