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 동백섬
해운대에 올랐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는 더 파랗다. 저 멀리 뭉게구름이 하얀 솜사탕처럼 피어 파란 하늘에 걸려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 왔을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그래서 선생은 이곳을 海雲臺라고 이름 지었나 보다. 해운대가 있는 동백섬은 내가 부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한때는 바닷물에 둘러싸인 섬이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연결되어 섬 아닌 섬이 되었다. 동백섬은 언제나 시간이 멈춘 듯 파도소리와 새소리만 들려준다.
부산은 나에게 특별하다. 결혼할 때까지 부산에 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신혼여행지로 부산을 선택했다. 부산은 너무 이국적이었고 보이는 것마다 신기했다. 사람들의 모습은 활기찼고 도시는 역동적이었다. 서면에 머물며 해운대, 광안리, 자갈치 시장 등을 다녔다. 생활한복을 입고 관광객 티를 내며 재밌는 자세로 찍은 사진들을 지금 보면 조금 부끄럽다. 그때는 그런 것들이 즐거웠으니 지금 부끄러운들 어쩌랴. 인생이란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부산에 살고 있다. 잠시 여행자가 되어 바람처럼 머무르려 내려온 곳이지만, 부산에 반해서 점차 부산사람이 되어간다.
부산에 이사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부부싸움을 했다. 한바탕 싸운 후에 동백섬에 갔다. 그날 동백섬에는 유치원 소풍을 간 다섯 살 아들이 있었다. 일부러 아들을 보러 간 것은 아니지만, 마음 한편에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들이 잘 놀고 있는가 보고 싶기도 했다. 멀리서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동백섬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았다. 바다는 눈부셨고, 바람은 산뜻했다. 이유가 있었던 부부싸움이었지만, 아들과 바람과 햇살 아래에서 그 이유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어느새 화해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부터 동백섬은 아주 특별해졌다.
시간만 나면 동백섬을 찾았다. 이름도 유명한 해운대가 어디인지 찾았고, 동백섬 꼭대기에 있는 최치원 선생 동상 앞에 머무르기도 하고, 바다 산책로를 걷다가 황옥 공주 인어상에 대한 전설도 알았다. 전통과 현대의 디자인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누리마루(2005년 APEC 정상회의 장소)에 대해서도 꼼꼼히 살폈다. 아는 만큼 동백섬이 내 것이 되었다. 관직을 버리고 세상을 떠돌던 최치원 선생이 찾은 곳이 이곳이란다.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왔을 최치원 선생을 이곳 바다와 구름이 위로해 주었길 바란다. 최치원 선생은 우리에게 해운대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겨주시고는 가야산에서 산신령이 되셨단다. 해운대 석각 전망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물결과 파도는 한 마리의 백마가 되어 하얀 거품을 만들며 해수욕장의 황금 모래밭으로 달려간다.
나는 호남평야에서 자랐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도 온통 반듯반듯한 논만 보이는 그런 곳이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평야는 계절별로 바뀐다. 봄에 모내기하고, 여름에 피사리하고, 가을에 수확하고, 겨울에 땅을 쉬게 한다. 바다는 매일매일 바뀌는 것이 신기하다. 어제의 바다는 뜨거운 바다였다면, 오늘의 바다는 차가운 바다이고, 내일의 바다는 성난 바다일 것이다. 모레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잔잔한 바다가 될 것이다. 수평선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세상이 네모나고 바다의 끝은 낭떠러지라고 여겼다던데, 수평선을 보고 있노라면 폭포의 끝을 보듯이 잘린 느낌이다. 그 끝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안다. 수평선을 계속 따라가 봤자 내가 닿을 곳은 바다의 끝이 아니고 일본의 후쿠오카쯤이 될 것이다. 가끔은 무 자르듯 정확한 과학이 아쉽다. 상상력이 남겨질 틈이 없다. 그 틈 사이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질 텐데 말이다.
다행히 동백섬의 틈으로 아직 황옥 공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무궁나라 은혜왕과 나란다국 황옥 공주의 결혼 이야기다. 황옥 공주는 보름달이 뜰 때마다 황옥 구슬을 통해 바다 저편의 고국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천 년도 더 지난 후 공주는 청동 인어상이 되어 우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傳說(전설)은 歷史(역사)가 되어 황옥 공주가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황후 허황옥이라고 한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에 허황후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썼다. 또한 허황후 릉에 있는 파사 석탑은 허황후가 결혼선물로 가져온 것인데 우리나라에 나지 않는 돌이라고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인도 남부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돌이란다. 일연 스님이 옆에 있다면 그의 관찰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황옥 공주가 누구든지 간에 바다를 건너온 것은 확실한가 보다.
유월의 동백섬은 이제 진짜 여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동백나무들은 색이 더 진해지고 울창한 그늘을 만든다. 동백섬을 밤 산책하기 딱 좋은 계절이다. 낮의 해운대가 달맞이 언덕과 미포와 해운대 해수욕장을 파노라마로 보여준다면, 밤의 해운대는 누리마루의 아름다운 야경과 깜깜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광안대교를 보여준다. 잔잔하게 들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황옥 공주 인어상이 있는 산책로를 돌다 보니 달빛을 받은 황옥 공주의 얼굴이 쓸쓸하게 보인다. 그녀의 얼굴에 평야 마을을 떠나 바다 마을에 살고 있는 내 얼굴이 겹친다. 보름달이 뜨면 공주가 황옥에 비친 고국을 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같다. 칠월의 보름밤에 동백섬을 찾아야겠다. 혹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