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2022 문학동네
많은 사람이 『데미안』을 칭송한다. 내가 속한 독서 토론모임의 책으로 데미안이 선택되었다. 인생책이라고 추천한 회원 덕분에 호기심을 가지고 『데미안』을 읽었다. 20대때 분명 재미있게 읽었겠지만, 다시 만난 『데미안』은 반쯤 읽을 때까지 빠지지 못했다. 에밀 싱클레어가 못마땅했고, 막스 데미안은 이상했다. 다섯 명인 독서 토론모임에서 세 명은 『데미안』을 융의 『인간과 상징』에 엮어서 해석한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재미없는 책을 어려운 철학서까지 보면서 이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왜 『데미안』이 백 년이 넘도록 인기가 있고 사람들은 헤르만 헤세를 칭송할까 생각했다. 그렇게 깨달았다. 물론 이것은 반골 기질이 있는 나의 해석이다. 하지만 그럴싸하다. 그 뒤로 나는 『데미안』에 빠졌다.
#『데미안』이 쓰이기 전의 독일과 헤르만 헤세의 상황
먼저 『데미안』이 쓰인 시대를 생각했다. 20세기 전후의 독일과 유럽은 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고, 결국 많이 가진 영국-프랑스와 가지지 못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대립이 이어졌다. 그런 와중에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젊은이들은 “위대한 조국을 위하여!”를 외치며 전쟁에 나갔다.
헤르만 헤세는 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신학교를 자퇴하고 자살 시도를 했으며, 공장이나 서점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그는 문학을 만났고,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하며 전업 작가가 되었다. 그는 외할아버지가 선교하던 인도와 스리랑카 등을 여행했다. 아마 그때 불교의 영향을 받았겠다고 생각된다.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참전 신청을 했으나 고도 근시로 참전하지는 못하고 독일 포로후원센터를 조직하고 후원하며 전쟁을 반대했다. 독일 정부와 국민은 그런 헤르만 헤세를 비난했고, 헤르만 헤세의 작품은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헤르만 헤세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인 랑 박사와 상담받으며 다이몬(신)의 꿈을 꾸었고 그 뒤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독일 정책을 비판(1917년부터)하고 『데미안』도 발표(1919년)한다.
#극 중 에밀 싱클레어는 누구인가?
싱클레어는 신학자의 아들이며 끊임없이 고뇌하고 방황하며 다른 무리와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데미안을 만난 이후에는 삶의 방향이 바뀐다.
나는 싱클레어는 목적 없이 성장한 시대의 젊은이라 해석했다.
전쟁 전에 할 일없는 청춘으로 술, 여자, 체념, 냉소, 자기파괴를 일삼으며 얕은 지식을 과시하며 지식인 행세를 한다. 조직에도 끼지 못하지만, 또 그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외로움이 내재하여 있다. 그들은 소문을 무조건 믿는다. 싱클레어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젊은이에게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이 개입한다. 그들의 역할은 안내자이다.
#프란츠 크로머는 누구인가?
프란츠는 독일 남자 이름 중에 흔하다. 영화 『프란츠』는 세계 1차 대전 중에 독일인 병사 프란츠를 죽이고 자책감에 시달리던 프랑스인 아드리엥이 프란츠의 고향을 찾았다가 만난 프란츠의 약혼녀 안나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프란츠를 식민지 쟁탈전에 나선 독일의 모습으로 해석했다. 폭력, 거짓말, 약탈, 약점 잡기, 전체주의, 집단화, 두려움, 가스라이팅으로 젊은이를 세뇌하여 ‘정확히 훈련된 청춘의 명랑함을 가진 기성품’으로 생산한다. 폭력적인 독일은 개인인 싱클레어를 괴롭힌다. 싱클레어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존재는 바로 싱클레어의 조국이다. 결국 싱클레어가 참전하고 성인이 되어 국가폭력에 저항할 힘이 생겼을 때야 싱클레어는 프란츠 크로머라는 이름을 마주하고 『데미안』이 끝난다.
#피스토리우스와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이다.
피스토리우스는 랑박사의 치료받으며 ‘다이몬’을 만나기 전의 헤르만 헤세와 가장 가까운 모습이다. 목사 아들이지만 신학의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지만, 행동은 없다. 가족과 신학을 어쩌지도 못하며 결국 공동체 안에 남는다.
다이몬 꿈을 꾸기 전의 헤르만 헤세가 피스토리우스라면 다이몬 꿈을 꾸며 깨달은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이다. 그래서 피스토리우스의 길 안내는 한계가 있다. 때로는 데미안은 신이며 양심으로 해석했다. 「베아트리체」에서 ‘나의 삶을 이루는 것, 너의 내면, 나의 운명 또는 나의 데몬’이라 말한다. 「종말의 시작」에서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꼬마 싱클레어, 나는 가야만 해. 너는 어쩌면 다시 내가 필요할지도 몰라. 크로머나 다른 어떤 것에 맞서기 위해서 말이지... 그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같았다. 내 친구이며 길 안내자인 그 사람과.’ 이제 헤르만 헤세의 역할은 『데미안』을 읽은 젊은이들이 가져가야 한다.
#『데미안』의 한계
젊은이들을 안내하려는 의도는 좋았으나 『데미안』은 몇 가지 한계가 있다.
첫 번째는 고통을 통한 깨달음이 부족하다. 싱클레어는 안내자의 말을 무조건 수용한다.
두 번째는 우연에 우연이 거듭되면서 운명이 강조된다.
세 번째는 은유가 너무 자주 사용되어 완전한 몰입을 방해한다.
아직 읽지는 못했지만,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쓴 책이 『유리왕 유희』가 아닐까 생각된다.
헤르만 헤세는 『유리왕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46년)
#헤르만 헤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기 안의 세계를 혁신
20세기 초반은 돈과 식민지와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고, 정의와 철학이 부재한 시대였다. 전체주의 속에서 개인의 성찰은 필요 없었고,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든 나라가 ‘전체’를 강조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동체 속에서만 소외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런 마음들을 이용한 무의미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데미안에서 나온 “알”은 ‘존재 이유가 없는 공동체’이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전체주의 폭력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뒷받침하는 구절
1.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이 깨달음이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2. 지금의 함께하기란 그냥 패거리 짓기일 뿐이야.
사람들은 서로 서로가 두려워서 서로에게로 도망치는 거지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하나가 아닐 때만 두려움을 갖는 법이야.
3. 유럽은 전 세계를 얻었지만, 거기 정신이 팔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의 날이 오는 거지. 사람들에겐 우리가 필요할 거야.
#『데미안』의 읽은 후에
-나는 누구인가?
-나의 길을 가는가?
-두려움 속에 의미 없이 공동체 안에 남아 있지 않은가?
-개인적인 나는 없어지고 사회에 복종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가치는 찾았는가?
-다른 사람에게 데미안, 즉 안내자가 되고 있는가?
그 순간하늘 저편에 성긴 누런 구름이 나타났다.
그 구름이 잿빛 구름의 벽에 막혀 뭉치자
바람은 겨우 몇 초 만에 누런색과 푸른 하늘색으로 거대한 새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새는 푸르른 혼돈을 찢어내고
커다란 날개짓을 하며
하늘 멀리 날아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