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2020 김영사
요즘 나는 ‘공자님 말씀에~’를 입에 달고 산다. 『1일 1강 논어 강독』을 읽었을 뿐인데, 모든 상황은 공자님 말씀과 딱 들어맞는다. 모든 나무의 색이 바래는 겨울 초입에 푸르른 소나무만 봐도 공자님 말씀이 생각난다.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也(자왈,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 세월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나무임을 알 수 있다)’
공자님 어록인 『논어』는 공자가 돌아가신 후에 제자들이 모여 자기들이 받은 가르침과 대화를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일목요연한 순서로 되어 있지 않고, 중간 제목의 의미도 없다. 하지만 공자의 말씀은 하나로 관통하고 2,500년이 지난 현재도 공자의 가르침은 유효하다.
『1일 1강 논어 강독』을 읽기 전에는 공자와 『논어』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공자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으면서 남들이 하는 말을 주워 들어 꽉 막힌 과거의 인물이라 생각했다. 이제라도 공자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으니 다행이라 여기며 공자의 말씀책인 『논어』를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어 수시로 본다. 공자는 주나라 말기 춘추시대에 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바른 정치를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릇이 작은 제후들이 아래에 두고 부리기 어려운 군자였으니, 평생을 중요한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결국은 제자들 양성에 공을 들였다. 『논어』를 읽으면서 3년이라는 시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공자는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3년간은 부모가 보살피기 때문에 자식도 부모상을 3년간 모셔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의 제자들은 3년 정도 공자에게 배우면 여러 나라에서 초청받고 떠난다. 덧붙여 생각해 보니 『천일야화』는 3년의 이야기이고,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속담도 있다. 『논어』는 學으로 시작하여 知로 끝난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자왈,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배우고 늘 익히고 있으니 이 또한 인생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배워서 익히고 알게 되기까지 3년이면 충분하다. 단 3년 동안 몸에 익히는 習의 단계에 충실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공자가 학습에 대해 강조한 것은 공자가 그렇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공자는 노나라의 추 땅에서 변변치 않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자가 어린 나이에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공자가 스물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집은 가난했다. 그런 상황에 열다섯 살의 공자가 선택한 것은 공부였다. 공자는 스스로 천재(生而知之)가 아니고 노력형 인간(學而知之)라고 했다.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결과에 만족하는 부분도 『논어』에 나와있다.
『논어』를 읽은 후에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심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다. 공자가 평생 일관되게 추구했던 道는 “忠恕”이다. 타인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 속에서 공자는 仁을 말하고, 義를 말하고, 禮를 말했다. 공자의 이런 마음은 실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공자는 주나라 예법을 연구한 禮 전문가이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그곳의 예법을 존중하며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喪을 당한 사람 앞에서는 몸가짐을 조심하며 애도하고, 장애인이나 노인이 지나가면 옆으로 서서 그들이 가기를 기다렸고, 맹인 악사에게는 사람들을 소개했다. 공자는 또 배움에 신분의 귀천을 두지 않고 천민의 아이에게도 가르침을 주었다. 공자의 제자들이 그런 공자의 태도에 불만이 있었음을 드러내는 구절도 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 대해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높이 평가한 제자는 안연인데,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공자는 세상을 다 잃은 양 슬퍼했다. 그러나 안연의 아버지가 안연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하자 그것은 거절한다. 나는 공자의 이런 모습에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 공자학당에서 정치-경제-사회-예법-음악-군사 등등을 배운다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사람 역할을 할 수가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공부만 잘하는 바보들이 얼마나 많은가. 仁이 없는 정치는 백성이 중심이 아니다. 仁을 뜯어서 보면 ‘사람이 둘’이다. 한마디로 인간다움이란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말한다. 공자는 인간다움을 위해서는 세상의 질서(禮)가 필요하고, 사람들의 상식(義)이 필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공자가 아끼는 제자였다지만, 장례를 위해 필요 이상의 요구는 禮와 義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모든 것의 중심에 사람을 두었지만, 사람다움이 유지되기 위한 공적인 질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공자는 명분 없는 안연의 아버지의 요구를 거부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와 소인에 대해서 자주 말했다. 사사로운 이익을 취하기 좋아하며,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소인이다. 土, 즉 땅이나 돈에 목표를 둔 것이 소인이다. 반면에 군자는 德을 목표로 공적인 이익에 뜻을 둔다. 군자에게는 오로지 義라는 기준만 있다. 말을 아끼지만, 행동이 민첩하여 빠른 실천력이 바탕이다. 공자는 ‘의를 바탕으로 겸손으로 상대를 대하고 믿음으로 의를 성사한다.’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ethos(성격, 신뢰), logos(논리), pathos(감정)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말하며 청중의 감정을 끌어낸다’. 동서양의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렇게 통하는가 보다. 『논어』를 읽으면서 군자는 되지 못하더라도 소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공자는 세 사람이 가면 한 명은 본인이고 한 명은 본인보다 나은 사람이고, 한 명은 본인보다 못 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은 사람도 못 한 사람도 모두 스승이라고 했다.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못난 사람이라는 평가는 받지 않게 살아야겠다.
박재희 교수는 코로나 시국에 손수 지은 오두막에 틀어 앉아 『논어』를 해체하고 『1일 1강 논어 강독』으로 다시 조립했다. ‘논어 498개 문장을 팥배나무 열매처럼 바닥에 뿌려놓고, 하나씩 다시 주워서 해당 주제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박재희 교수가 9개의 서랍에 담은 『1일 1강 논어 강독』은 어렵게만 보이던 『논어』를 잘 풀어서, 우리같이 『논어』를 처음 읽는 사람들이 공자에게 가는 좋은 안내서이다.
孔邱. 매우 큰 언덕에 마음을 기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