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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Oct 12. 2023

딸의 전화번호와 앤의 소매가 부푼 드레스

앤과 머릴러 사이

 

 ‘빨간 머리 앤’은 누구나 아는 아이다. 빨간 머리를 양 갈래로 따고 정신 사납게 꾸민 꽃 모자를 쓰고 교회에 가는 그림이나 홍당무라고 놀린 길버트의 머리를 석판으로 때리는 그림은 누구나 한 번쯤은 보았을 장면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우리나라의 텔레비전을 점령했던 80년대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빨간 머리 앤」은 텔레비전만 켜면 나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빨간 머리 앤은 20세기 초에 캐나다의 여류작가인 몽고메리가 쓴 소설이 원작이다. 80년대를 살았던 우리에게 빨간 머리 앤은 소녀 시절 꿈을 꾸는 ‘나’를 대변한다. 누구나 한 번쯤 앤이 되고, 누구나 한 번쯤 앤을 만난다. 앤 설리의 이야기는 그녀가 자란 애번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대학을 다니고, 교장이 되고, 길버트와 결혼하여 아기를 낳고, 아들딸 여섯 명의 어머니가 된다. 내가 앤을 다시 만난 것은 내가 엄마가 되고 있을 때였다. 사랑스러운 앤은 기품 있는 여인이 되어 이야기 밖으로 나가고 점차 앤의 아이들이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앤처럼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항상 배 속의 아이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내가 막상 엄마가 되었을 때 나의 모습은 친절한 앤보다 엄격한 머릴러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완고하게 세웠던 결정을 번복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휴대전화 개통을 하자던 반 강제적 합의를 깨고 중학교 1학년때 휴대전화를 개통해 준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요즘 아이들은 이미 초등 시절부터 스마트폰과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다. 이제는 초등학교만 들어가면 으레 전화기부터 사준다. 어느새 우리 아이들만 빼고는 모두 가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인데 전화번호가 없다는 사실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한다. 아이들 친구 엄마들은 이제는 필수품이니 어서 사주라고 성화다. 한번 결정하면 앞만 보고 가는 성격이라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핑계는 많았다. 유튜브에 중독이 되거나, 단체카톡방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다 떠나서 아직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전화번호만 없을 뿐 빈 스마트폰이 있어서 와이파이가 되는 곳에서 게임이나 인터넷을 즐길 수 있으니 더더욱 필요 없었다. 완고한 부모의 모습에 아이들도 미리 체념했다.     


 친구들과 매우 친해졌을 텐데 아이가 주말에 집에만 있다. 처음에는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지내지 못하나 싶었다. 자꾸 아이의 교우관계를 물어보았다. 큰 이상을 못 느꼈다. 친구들 이야기도 하고 재미있게 학교도 다니는데, 주말에는 놀 친구가 없다니…. 그러다 문득 요즘 다 있는 전화가 이 아이에게는 없구나 싶었다. 엄마 번호 알려줘도 되고, 엄마 카톡에 친구 추가해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 친구 몇몇은 내 전화기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는 오지 않는다. 아이 친구로서는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불편하겠구나 싶었다. 우리 어릴 때야 친구 집에 전화해서 ‘저 수미인데요, 성숙이 있어요?’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요즘 일대일 전화 통화가 가능한 시대에는 누구를 바꾸어 달라는 것 자체가 어색하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결정했던 일인데, 아이가 소통할 통로를 차단한 셈이다.    

 

 남편과 상의했는데, 남편은 시간을 두고 결정하자고 했다. 그날 우연인지, 신의 계시인지 딸이 말한다. ‘엄마, 친구에게 엄마 전화번호 줄 때 엄마꺼라고 말 안 해도 돼? 엄마꺼라고 하니까 안 알려줘도 된대.’ 이 말이 너무 슬펐는지, 하루가 지나기 전에 남편이 먼저 사주자고 결정을 내렸다. 약간의 아쉬움. 지금까지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은 ‘대단한’ 부모라는 칭찬을 버려야 했고, 혹시나 있을 스마트폰 사용에 대한 분쟁도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깟 남들의 칭찬을 유지하기 위해 알면서 모른 척할 수도 없고, 스마트폰 사용 시간에 대해서는 그동안 빈 전화기로 훈련이 잘되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왠지 모를 미련을 뒤로하고 중대 발표를 했다. 중학교 1학년인 딸은 내일 당장 만들어주기로, 초등학교 6학년 아들은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만들어주기로. 아이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표정으로 자꾸 물었다. 절대로 안 생길 줄 알았던 전화번호다.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에 우리 부부도 잘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문득 앤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머릴러는 에번리의 모든 소녀가 부푼 소매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사치라며 앤에게 항상 검소한 단색무늬의 옷을 만들어준다. 머릴러가 나쁜 것은 아니다. 머릴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어쩌면 머릴러가 옳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앤이 친구들과 있는데, 어딘가 앤만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매슈가 알아본다. 매슈는 옆집 린드부인에게 부탁했고, 앤은 드디어 소매가 부풀고 색이 고운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그 뒤로 머릴러도 앤에게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준다. 모두가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었을 때 앤만 반듯한 일상복을 입은 모습이 마치 앤이 고립된 섬 같았다. 그리고 그 고립된 섬은 전화번호 없는 우리 아이들이었다. 비로소 나도 머릴러에서 앤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간 셈이다.      


 아이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학교에 간다. 등교하자마자 전화기들을 모두 모아 다른 곳에 보관한다. 굳이 학교에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등교하면 내고, 하교할 때 찾는 귀찮음이 있지만,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행복인가 보다. 그동안 분주하게 전화기를 모으는 시간에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특별하게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특별하게 혼자 공허한 시간을 가졌겠구나 싶다. 가끔은 인생을 먼저 겪어온 경험자로서, 내가 가진 눈높이에서 아이들을 키울 때가 있다. 위험한 것은 미리 차단하고, 꽃밭만 걷길 바란다. 일상에서 넉넉함을 찾기를 바라며 사치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주지 않는다. 하지만 비도 맞아봐야 우산도 준비한다고, 너무 과한 억제는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 같다. 이제 아이가 한 뼘 자란 키만큼 마음도 크길 바라며, 나도 한 발 뒤로 물러서는 연습을 한다.      


 수업을 마친 아이에게서 문자가 온다. ‘가는중!’ 이모티콘과 함께 보낸 문자를 보며 아이도 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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