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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Oct 17. 2023

한번의 이력서

 편의점을 나오는데 진열된 이력서가 눈에 들어왔다. 문득 ‘내가 언제 이력서를 써봤나?’ 생각해 본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딱 한 번 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용돈을 벌까 하고 학원의 사회과목 강사직에 이력서를 제출했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 뒤로 이력서를 써본 적이 없다. 유일한 직장생활은 대학 박물관 조교였지만, 1년 계약직이라 이력서 제출 없이 추천으로 다녔다. 문득 변변한 직장을 다닌 적이 없는 내 인생이 허무해졌다. 그토록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      


 취업 걱정 없이 공부만 하다가 결혼했다. 하던 대학원 공부도 끝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취업에 관해서 이야기하신 적이 없다. 어쩌면 내가 직장에 다니지 않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잘 사는 집 딸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전형적인 무쇠 숟가락이고, K-장녀였다.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내가 집안일을 거들기를 바랐고, 점차 동생들 식사, 청소, 빨래는 내 몫이 되었다. 나이 차이나는 남동생들이었으니 집안일은 내가 하는 것이 당연했다. 심지어 바쁜 농번기에는 삯일하시는 십여 명의 점심 식사 준비도 내가 했다. 수년 동안 집안일을 한 것에 대해 불만은 없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쉽다.      


 대학교에 다닐 때 친구가 꿈이 무어냐고 물었다. 성인에게 하는 질문치고 뜬금없는 질문에 나도 뜬금없이 대답했다. ‘현모양처(賢母良妻)’가 나의 꿈이라고. 이름을 남긴 위인의 뒤에는 항상 든든한 어머니가 있었다. 아킬레우스에게는 테티스가, 공자·맹자에게는 자식의 공부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머니가, 카이사르에게는 적절한 교양교육을 시킨 아우렐리아가, 율곡 이이에게는 우리가 다 아는 신사임당이 있었다. 유교적 가르침이 팽배했던 20세기에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어쩌면 누구나 갖고 싶은 희망 사항이기도 하다. 반은 우스갯소리로 대답한 것인데, 지금 나는 ‘가정주부’ 역할에 충실하다. 엄마 손을 거들기 시작하면서 살림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 각인되었고, 그것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한꺼번에 여러 개의 일을 할 수 있고 식구들을 위해 맛있는 식사를 뚝딱 준비한다. ‘엄마 음식이 제일 맛있다’라는 아이들의 칭찬은 ‘누나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다’라고 했던 동생들과 겹친다.     


 고향에 갔다가 친하게 지내는 초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친구는 동네 유일의 목욕탕집의 장녀였다. 친구의 엄마는 종종 친구에게 목욕탕 계산대를 맡기고 외출하셨다. 친구는 많은 손님이 붐벼도 단번에 계산했고, 계산에 오차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 친구와 나는 일하는 엄마들의 숨구멍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우리는 가장 친했고, 가장 가까이에 살았고, 가장 많이 어울렸다. 친구를 오래간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친구가 갑자기 말을 꺼낸다. 친구는 내가 동생들 밥을 끼니마다 챙겨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단다. 마치 내가 ‘식모’ 같았다고 말했다. ‘식모 食母’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집에 고용되어 집안일을 해주는 사람’이다. 식모라는 단어에 순간 당황했지만, 나는 그때도 ‘식모’였고, 지금도 ‘식모’이다. 식구의 식사를 책임지는 사람. 그 일에 너무 열성이라 지금도 한 끼 밥도 무조건 새로 안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리를 한다. 요리는 참 즐겁다. 정성껏 준비해서 이쁘게 상차림하고 아이들의 칭찬을 들으며 먹는 음식이 꿀맛이다. 어제도 딸이 좋아하는 라구파스타를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내가 이런 생활이 쭉 이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의 삶도 똑같다. 목욕탕 계산대에서 계산하던 손은 결혼 후에 옷 가게를 거쳐 창업한 맥주 가게에 집중했다. 친구는 잠시 경제적 고비가 있었지만, 지금은 고향에서 성공한 사업가이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밤낮없이 노력하여 이룬 성과는 이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미다스의 손이 되었다. 그녀 부부가 일군 삼 년은 이제 이십여 개가 넘는 매장을 운영하는 사업체로 성장했다. 지금은 매장들의 매출을 점검하는 일이 그녀의 일이다. 내가 아이들 음식 준비로 바쁘듯이, 친구는 매일 매출을 계산하느라 바쁘다. 분명 청춘의 꿈도 있었고 미래도 꿈꾸었지만, 그때의 일이 뿌리가 되어 지금 울창한 나무가 된 것에 서로 웃었다. 그러고 보면 이력서라고는 달랑 한 장 내봤지만, 내 삶이 그렇게 무의미하지는 않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던가. 친한 친구도 이력서를 내본 적이 없는데, 내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는 고향에 내려가 자라 농장을 하다가 다시 늦깎이 나이에 대학을 입학했다. 지금은 전공을 살려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일은 본인이 주인이다. 남편이 직원의 이력서를 받는다. 가끔은 일하는 친구들이 부럽다가도 지금 내가 가정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여전히 마음속에 현모양처를 품고 있는 나이다. 편의점 매대 아래에 깔린 이력서 한 장이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나의 젊은 시절을 관통한다.     


 텅 빌 것 같은 이력서에 학력 이외에도 두 줄은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수필등단 · 시인등단. 종이를 앞에 두고 머리를 쥐어뜯지만, 원고 청탁을 받고 있으니 한 줄 넣기에 아주 훌륭하다. 언젠가 출간작가라는 이름까지 얻는다면 세 줄은 채울 수 있다. 보낼 곳 없는 이력서지만, 다음에 편의점에 가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사야겠다. 나의 인생을 하얀 종이에 담아 나의 고객인 아들과 딸에게 부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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