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방수미 Oct 23. 2023

노인을 생각하다

 명절 연휴에 캄보디아에 간다. 들뜬 마음으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일정을 짜고, KTX도 예매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은 어느새 다가왔고, 짐을 챙겨 역으로 향했다. 캐리어가 세 개나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이 기차를 타려면 여기에서 타는 것이 맞냐?”라고 물었다. 흰 종이에 큼직하게 열차 번호와 객실과 좌석 번호가 쓰여 있었다. 아마도 추석을 맞이하여 역귀성을 가시는 듯. 아마도 서울 자녀분이 인터넷으로 차표를 예매하고 좌석 번호만 불러주었을 듯. 그런 모습의 할아버지였다. 남편이 우리랑 같은 기차라고 말하며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할아버지에게 이 끝으로 가면 특실이 있으니 2호차를 타시라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우리 객차에 탔다. 자리에 앉으러 가는데 이번엔 노부부의 대화가 들린다. 가방은 위로 올리면 된다는 둥. 얼핏 보니 가방이 아니고 10kg 캐리어이다. 올려드린다고 말할까 하다가 말았다. 내가 베푼 친절이 상대방에게는 괜한 참견으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 자리에 앉으려는데, 할아버지가 그제야 캐리어를 올리려 한다. 딱 봐도 힘에 부친다. 후다닥 가서 캐리어를 잡고 올렸다. 꽤 무거웠다. 노부부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고, 나는 자리에 돌아왔다. 딸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뭐라고? 뭐라고? 아이가 말을 너무 작게 해서 두 번 물은 끝에야 들린다. “엄마·아빠는 잘 도와주는 것 같아.” 예상하지 못한 말에 놀라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부모가 한 행동을 유심히 보고 이렇게 이야기해 준 딸이 고맙기도 했다.    

 

 언젠가 지하철에서 훈훈한 모습을 보았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으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데, 앞에 허리가 꼬부랑 할머니가 달팽이보다 느리게 걷고 있었고, 그 뒤에 대학생쯤 될법한 젊은이가 같은 속도로 걸으면서 할머니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참 착한 손자구나’ 싶었는데, 할머니가 지하철에 오르자 그 청년은 다른 칸에 탔다. 혹시 하는 마음에 할머니와 같은 객차에 타서 청년을 기다렸지만,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청년은 모르는 할머니를 보호하면서 느리게 갔었나 보다. 그 훈훈한 모습은 나의 머리에 강하게 남았다. 바쁨을 핑계로 주변을 살피지 않고 다녔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주변을 더 살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도움이 필요한 노인들이 많이 보였다. 그 뒤로 나는 길을 가다가 항상 노인들 앞에서 1초간 머뭇거린다. 혹시 어려움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길을 못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무엇이 불편하지는 않은지…. 매의 눈으로 바라본다. 노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주 단순하다. 대체로 길을 헤매거나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었다. 작은 도움에 노인들은 아주 고마워했고, 나도 뿌듯했다. 어느 순간 그런 행동은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공감 주술도 더해졌다. 전쟁 전후에 태어나신 우리 부모님도 노인이다. 내가 길에서 노인들에게 도움을 주듯이, 우리 부모님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도움을 받길 바라는 마음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 노인들이 세상을 알기는 너무 어렵다. 우리 사회가 변하는 속도는 화살보다 빠르다. 코로나19의 암흑기를 3년이나 거치면서 공동체는 깨졌다. 이제 비대면 접수가 편하고, 궁금한 것은 스마트폰이 대신한다. 천연덕스럽게 참말 거짓말 아무 말이나 해대는 AI 챗봇까지 등장했다. 나도 적응하기 힘든데, 70대 노인은 오죽할까. 게다가 우리 사회는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노인들에게는 꼰대, 나잇값 못하는…. 이런 수식어가 붙는다. 장애인, 어린이, 동성애자에게도 혐오가 쏟아진다. 심지어는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혐오하는 말을 한다. 이런 갈라치기의 끝은 어디일까 걱정이다. 사람이 지탄받는 이유는 그 사람의 행동 때문이다. 개개인의 행위를 집단 전체로 보고 공격하기 바쁘다. 이런 사회 속에서 누가 자유로울까. 점점 사회는 배려와 공감에서 멀어지고 있다.      

지붕뚫고 하이킥

 노인들에게는 지혜가 가득하다. 반백 년 이상 살아오면서 삶의 나이테가 그려져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지혜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모두 노인이 된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활기 넘치는 탄력에 그 사실을 망각한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오래전에 인기가 있었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김자옥과 결혼사진을 찍으러 갔다. 노인이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은 모습에 젊은이들이 비웃음을 담긴 웃음을 흘렸다. 이순재는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그때는 노인의 황혼 결혼을 희화화한 장면에 같이 웃었다. 뭘 그렇게 요란스럽게 턱시도와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런 내 생각이 창피하다. 머리가 검든 희든 창의적인 생각을 하고 살면 모두 청춘이다. 피부에 주름살이 생기고 내장은 하나씩 신호를 보내지만, 마음은 항상 팔팔한 청춘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노인사회로 급속히 진입하고 있다.      


 딸의 격려 한마디에 하루가 행복하다. 누가 보고 칭찬해주길 바라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딸이 칭찬해주니 더 보람 있다. 옆 눈을 가린 경주마는 빨리 달릴 수는 있지만, 산이 푸르고, 하늘이 파란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 아이들도 너무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주변을 돌아보며 느리게 걷길 바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빅토르 위고와 프랑스혁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