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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Nov 19. 2023

햇볕을 담은 함양

함양휴게소에서 만나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그 도시의 문화를 응축해 놓은 멋진 문화공간이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생리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쪽잠으로 피로를 풀기 위해 들린다. 잠시 머문 그곳에서 교과서 밖의 새로운 역사를 배운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함양 휴게소는 나를 함양의 매력에 빠지게 했다.    

함양휴게소

 처음 함양휴게소에 갔을 때 화장실 입구에서 레드카펫처럼 빨간 낙엽이 깔린 사진을 보았다. 황홀한 풍광만으로도 입이 떡 벌어지지만, 그 아래의 설명에 더 압도된다. 이 숲은 신라시대 말기의 유학자 고운 최치원이 범람하는 물을 다스리기 위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숲인 상림이다.

그때 나는 부산으로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부산의 해운대라는 이름이 최치원 선생에게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에 매료되어 매일같이 동백섬 최치원 동상 아래에 놀러 가곤 했었다. 경주의 최치원이 부산의 최치원으로 나타났고, 이제는 함양의 최치원이 되었다. 상림은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는 길에 들렀다. 그때가 늦가을인지 초겨울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림에는 낙엽이 모두 떨어져서 고혹한 분위기였다. 자연 그대로의 거친 거북바위와 사랑으로 하나가 된 연리목 나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아이들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마치 동네 아이들처럼 놀았다. 상림에 있는 최치원 신도비에서 최치원 선생을 만나 “부산에서 왔어요”라고 가볍게 인사를 했다. 그 뒤로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면 가끔 상림에 머물며 숲도랑에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함양휴게소

 함양휴게소에는 물레방아도 있다. 처음에는 흔한 설치미술이려니 했는데, 이 물레방아에도 이야기가 있다. 연암 박지원은 사신을 따라 청나라 북경과 열하에 다녀왔다. 그는 청의 선진문물을 일기로 남겼고, 그것이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는 단순히 개인의 생각과 기억을 넘어 박지원의 철학을 잘 정리했다. 좋은 일기의 형식을 제대로 보여 준 열하일기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

 박지원은 함양의 안의면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는 ‘용이 지축을 울리며 승천한다’는 용추계곡의 거센 계곡물을 보고 열하에서 보았던 물레방아를 떠올렸다. 우리가 사극에서 흔하게 보던 물레방아를 우리 땅에 제일 먼저 들여온 이가 바로 박지원이다. 그전의 방아는 발로 디뎌 찧는 디딜방아나 소가 돌리는 연자방아였다. 디딜방아나 연자방아는 사람손이 필요하다. 박지원이 들인 물레방아는 안의현의 아낙들의 일을 줄여주었다. 지금 함양 용추계곡의 물레방아 터에 함양군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아주 큰 물레방아가 우람한 물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함양휴게소 통영방향

 최치원과 박지원의 등장으로도 놀랄만한 함양 휴게소의 높은 곳에 정자가 우뚝 서 있다. 너무 높이 있어 사람의 발길이 뜸하기도 하고 보수공사로 통행금지될 때도 있다. 함양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다.

동호정 군자정
거연정 농월정

 꽃과 나무가 많은 화림동 계곡에서 선비들은 정자를 만들어 시를 읊었다. 거연정,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6km 거리에 있는 네 개의 정자를 산책하며 조선 선비들의 시를 떠올려본다. 거대한 너럭바위에 앉아 물 건너 동호정을 바라보니 시가 저절로 나온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은 단순히 외관만 아름다운 누각이 아니다. 바른 선비의 기상이 함께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구의 나이에 선조를 등에 업고 십리를 달린 장만리 선생(동호정)과 유학의 옳은 말씀을 제일로 여기고 실천한 정여창 선생(군자정)과 병자호란의 굴욕에 벼슬을 떠난 박명부 선생(농월정)의 얼이 새겨져 있다. 주자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거연정도 정자로써 일품이다. 지리산의 기상과 덕유산의 따뜻함이 선비들의 마음에 스며들었나 보다.      

 함양은 물과 인연이 참 깊다. 위천의 상림, 용추계곡의 물레방아, 화림동계곡의 정자가 모두 함양의 물과 함께 한다. 덕유산 맑은 물이 햇빛을 만나 함양을 더 반짝여준다. 푸짐하게 쏟아내는 가을 햇볕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함양 휴게소에서 함양을 만난다. 이름처럼 ‘햇볕이 두루 미치는 곳’ 함양(咸陽). 천년의 역사에 다시 천년이 더해지도록 함양을 찬양한다


*함양의 물소리     


방수미


햇볕이 두루 미치는 곳

함양(咸陽)     

고운 최치원은

위천이 범람하여 백성이 고통을 겪자

상림을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살펴주었네     

연암 박지원은

물 맑고 물 깊은 안의현에

물레방아를 만들어

손쉽게 방아를 찧게 했네     

깊은 천년숲이 식혀주는 나그네의 땀

물레방아 소리에 담긴 아낙네들의 웃음

고운과 연암의 혼이 어려

함양에는 햇볕이 빠진 곳이 없구나.     

용이 지축을 울리며 승천하는 용추계곡

시원한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햇볕과 물의 축복을 받은

함양을 찬양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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