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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Nov 18. 2023

세병관 기둥에 기대어

통영의 역사 스토리텔링

 한국의 나폴리 통영. 별칭에 반해 이십 년 전에 통영을 찾았다. 늦가을 통영의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였다. 어느 해변이든 한가로운 바다와 작은 통통배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너무 오래되어 지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미륵산에 오르면서 바라보던 통영 바다의 반짝이던 눈부심은 오래 간직하고 있다. 마음에 통영을 담았다.     


 부산으로 이사를 한 후 통영에 자주 갈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통영 걸음이 어렵다. 오래간만에 마음을 먹고 아이들과 통영을 찾았다. 통영에서 관광할 곳을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것들을 공부했다. 여행의 시작은 삼도수군통제영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문화해설사 선생님께서 코끼리처럼 활짝 열린 귀를 가진 우리를 위해  열띤 설명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모은 자료에만 기대어 삼도수군통제영을 봤다면 그저 거대한 규모에만 놀랐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 이름만으로도 어마어마하다. 조선 시대 충청, 전라, 경상의 수군을 통솔하던 해상 방어 총사령부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 ‘통제영’을 줄여서 지금의 ‘통영’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초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바로 그 유명한 이순신 장군으로, 이순신 장군께서 처음 통제영을 설치한 곳은 한산도였다. 한산도는 임진왜란 때 왜적 방어를 위한 가장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지금 통영 시내에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은 1603년에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세웠다.     

 삼도수군통제영에 세병관이 있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대 건축물이고, 세병관이라는 말은 무기를 씻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두보의 시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다. 팔작지붕 양식에 정면 9칸, 측면 5칸의 외관이 경이롭다. 통영이 예술인의 도시가 된 이유도 이곳 삼도수군통제영에 있었다. 세병관에는 엄청나게 많은 현판이 있는데, 거기에는 빼곡하게 통제사는 물론 통제사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쓰여 있다. 한양에서 통제사가 부임하면서 데려온 사람은 군사전문가뿐만 아니라 통역가, 한의사, 예술인들도 있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통영은 한양의 문화와 예술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였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세병관은 소학교로 운영되었는데, 윤이상 작곡가와 박경리 소설가는 세병관으로 소학교를 다니셨다. 큰 꿈을 키우기 좋은 유년기에 세병관을 매일 같이 드나들며 저 멀리 바다를 보고 자라셨으니, 그분들의 감수성과 예술성이 그렇게 싹텄나 보다.      

 세병관 마루에 걸터앉으니 햇살이 우리에게 비친다. 굵은 느티나무 기둥을 보고 있자니 저 나무가 기둥이 된 지도 벌써 사백 년이 넘었고, 그전에 저렇게 굵은 나무가 되려면 수백 년은 살았을 텐데, 족히 천년을 지탱해 온 나무 기둥이 경이롭다. 느티나무 기둥은 햇빛을 받으며 자연 그대로 아름다운 무늬를 깊이 새겼다. 특히 마루에 앉아서 보이는 오른쪽 끝 기둥은 아침에 뜨는 해부터 저녁에 지는 해까지 종일 햇볕을 받아 보고만 있어도 따뜻하다. 가만히 기둥에 손을 얹고 눈을 감는다. 세병관 마당에서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이 보인다. 왜군이 물러난 태평성대에도 열심히 훈련하여 다시는 우리의 바다가 침범받지 않게 하려는 듯이.    

 

 박제된 역사 같고 구식 같았던 우리 문화가 언제부터인가 좋아졌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오래된 것의 가치를 깨닫고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바쁘게 스치는 것 말고 문 하나, 담 하나, 나무 한 그루를 찬찬히 보고 싶다. 일부러라도 마루에 걸터앉아보고, 또는 담벼락에 기대 보기도 하고, 아니면 기둥에 손을 얹는다. 그러면 마치 무성 영화처럼 소리 없는 움직임이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이 주는 즐거움은 헤아릴 수 없다. 세병관 기둥에서 손을 뗀다. 눈을 뜨니 바로 눈 아래 바다가 보인다. 양지바른 곳의 고양이처럼 가을 햇볕을 받으며 계속 있고 싶지만, 우리에게는 다음 일정이 있다.     

 세병관 왼쪽에는 유명한 벽화마을 동피랑이 있다. 피랑은 벼랑의 통영말이다. 동쪽 벼랑인 동피랑. 우리는 조선 시대와 현재의 중간 어디쯤을 가리키는 동피랑 마을로 발걸음을 향했다. 통영이 유명해지면서 동피랑 일대를 모두 공원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주민들이 오갈 데가 없어질까 봐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이곳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해서 마을을 그대로 지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벽화마을이 바로 통영 동피랑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엄청나게 많은 벽화마을이 있다. 부산만 해도 감천문화마을, 흰여울문화마을, 초량이바구길 등 오래된 골목과 계단이 벽화로 채워졌다. 대체로 시에서 주도한 벽화마을인데, 동피랑은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만든 벽화마을이다. 지금도 이년에 한 번씩 벽화를 새로 그린다니, 동피랑은 이년에 한 번씩 찾아야 할 것 같다.     


 통영의 바다는 유독 반짝인다. 수백 년 전 임진왜란의 한가운데 있었는데,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잔하기만 하다. 동피랑 꼭대기에서 바다를 바라보았으니 이제 중앙시장으로 가서 통영의 맛을 보련다. 코가 벌써 냄새를 맡았나 보다. 멀리에서 통영 특산품 꿀빵집에 선 줄이 보인다. 자연스레 그쪽으로 걷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통영. 통영이 주는 자연과 문화와 맛을 한 꼬집 얻어 마음의 항아리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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