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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Dec 01. 2023

벌써 2023년 12월 1일

_ 동행, 함께 걷는 남편

 현관문을 나서서 문을 닫을 때마다 어떤 문구를 마주한다. <立春大吉>·<建陽多慶>. ‘오늘도 좋은 일만 있기를’, 八자 모양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글귀를 보면서 하루의 안녕을 속삭인다. 문득 나란히 머리를 맞댄 한지 두 장이 우리 부부와 닮아 보인다.     

 큰 시누 아주버님이 해마다 정성스레 글을 써서 입춘방을 보내주신다.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현관문에 붙이고 올해의 글귀는 거실에 붙인다. 올해의 글귀는 해마다 노자의 글에서 찾아서 쓰시는데, 글씨도 명필이지만, 내용도 한해를 아우른다. 2023년의 문장은 <無>이다. 無. 마음도 비우고, 묵은 살림도 비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아주버님이 보내주신 글귀는 언제나 우리 집과 잘 어울린다. 먼저 십삼 년째 늘어나 아이 방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장난감이 대폭 정리되었다. 큰아이 방을 만들어주면서 침대와 책상이 들어갈 공간이 필요해 방의 선반마다 켜켜이 쌓인 장난감들을 많이 정리했다. 아이들 손때 묻은 추억이 아쉬워 반은 아껴두었지만, 아마 내년에 작은 아이 방을 만들면서 완전히 비우지 않을까 싶다.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덩달아 마음속에 가득한 욕심과 교만을 비운다. 신기하게 비우기는 매일 하는데 욕심 덩어리들은 언제나 가득 찬다. 장난감의 반을 아껴두듯, 욕심도 항상 남겨두어 새끼를 치나 보다.     

문학계간지 『여기』통권 58호

 마지막 달력을 앞에 두고 2023년을 돌아본다. 나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지난 일 년 간은 특별히 文運이 함께했다. 작년 12월에 수필가로 등단했고, 올해는 시인으로 등단했다.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 열심히 배웠고, 열심히 노력한 대가가 이렇게 빠른 결과로 나오니 행복하다. 특히 시인 등단은 남편과 같이 이루었다. 작년에 수필을 배우러 다닐 때 남편은 내 글을 항상 첨삭하며 다듬어주었다. 남편은 나에게 백거이가 시를 써서 들려주던 동네 노파와 같은 존재였다. 남편은 글쓰기 수업을 받으러 가는 나를 부러워했다. 올해는 남편의 시간과 시인반 수업 시간이 맞아서 봄부터 열심히 수업도 듣고, 시 숙제도 같이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이 되고 격려가 되면서 함께 발전했다. 그리고 부부 시인 등단이라는 영광도 함께 했다. 무겁고 어려운 내 시와 다르게 남편의 시는 다정하고 서정적이다. 남편과 동행하며 詩를 같이 나누는 한 해였다.      

『1일 1강 논어 강독』독서토론 모습

 남편과 나는 또 같은 독서 토론모임의 회원이다. 한 번 불붙으면 확 타고 꺼져 버리는 시너처럼 일회성 모임이 될 뻔했는데 남편이 참여하면서 정기적인 모임으로 바뀌었다. 처음에 나와 친구들은 커피나 마시며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시작은 그랬다. 그 자리에 남편이 참석했고, PPT까지 준비해 오는 열성에 가벼웠을 독서 토론은 2시간이 넘게 열정적으로 토론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날 2022년 12월 22일 부산에는 첫눈이 내렸다. 독서 토론모임을 마치고 나오는데, 하얗게 휘날리는 눈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독서 토론모임은 삼 개월에 한 권씩 읽고 발표하는 정기 모임으로 확장되었다. 이름도 투표를 통해 「이음 책방」으로 결정했다. 책은 나부터 시작하여 각자 원하는 책을 선택했다. 『잉글리쉬 페이션트』, 『데미안』, 『1일 1강 논어 강독』을 거쳐 이번 달에는 『장미의 이름』을 하고 3월에는 『황금 당나귀』가 내정되어 있다. 발표를 해야 하니 책을 더 꼼꼼하게 읽게 되고, 나만의 해석도 한다. 일 년 동안 책 읽는 수준이 한층 높아졌음이 느껴진다. 자랑스러운 이 모임은 남편과 내가 시인으로 등단할 때 각자의 약력에 넣었을 정도이다.      

 올해 시작한 것 중에 또 남편과 함께하는 것이 있다. 산책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7시에 집을 나와 산책한다. 우리가 정한 나무를 기점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딱 30분이 걸린다. 그 30분은 각자 보낸 하루를 토해내 버무리는 시간이다. 일, 아이들, 책, 뉴스 등등 오늘 보고 들은 것을 같이 나눈다. 중요하든 중요하지 않든 가슴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비우며 한바탕 걷고 들어오면 마음도 몸도 상쾌하다. 30년이 돼 가는 신도시는 계절마다 나무색이 다르다. 앙상한 나무에서 연두색 잎이 먼저 돋아나고, 그 잎은 초록색이 되었다가, 다시 감색이 되고, 감색 잎마저 우수수 떨어져도 우리의 이야기는 네버엔딩 계속된다.     

 특별함이 전혀 없는 소소한 일상은 매일 이어진다. 새벽에 뜨는 해의 빛이 매일 다르듯, 미묘하게 다른 일상은 항상 설렘을 준다. 오늘 아침에는 동쪽 창에서는 해를, 서쪽 창에서는 아직 뒷산으로 넘어가지 못한 달을 만났다. 달도 저무는 2023년이 아쉬운가 보다. 사진으로 오늘을 기억한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새로운 해를 위해 달력은 한 장만 남았다. 아직 은행잎이 노랗게 매달려 있는 늦가을의 산책로를 걷는다. 오늘 그와 나는, 『장미의 이름』에서 발견한 것을 나눈다. 시인반 수업이 끝나고 이어지는 『삼국유사』 수업에서 일연 스님의 탁월함을 칭송한다. 無에서 有로, 有에서 無로. 생각과 이야기는 無와 有를 친구 삼아 서로에게 넘나 든다. 나에게도 좋은 동행이 있어 비울 것 비우고, 채울 건 채운다. 오늘도 별 탈 없는 하루에 감사하며, <立春大吉>·<建陽多慶>과 눈빛을 교환하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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