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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Jan 01. 2024

스키장에서

 눈이 부시다. 더럽혀지지 않은 하얀 눈밭이 정말 예쁘다. 황홀한 눈(雪)이 눈(眼)을 정화해 주는 시간이다. 한바탕 눈 구경을 하고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내려오는 스키어들을 살핀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이들과 남편이다.       

 스키장을 처음 가 본 것은 스물다섯일 때다. 무주리조트 티롤호텔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동생을 보기 위해 부모님과 리조트를 찾았다. 훤칠한 키 덕에 잡일에서 벗어나 멋진 옷을 차려입고 벨보이를 하는 동생을 오래간만에 보고 안부를 물었다. 짧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만나고 돌아서는데, 온통 세상이 하얗더라. 도시에 내리는 눈은 내리자마자 지저분하게 더럽혀지기 때문에 눈이 내릴 때만 예쁜데, 그곳은 하늘은 파랗고 스키장의 눈은 새하앴다. 그런 예쁜 세상은 처음이었다. 넋 놓고 스키장을 보고 있으니 동생이 셔틀버스라도 타보고 가라고 했다. 부모님과 함께 셔틀버스를 탔다. 셔틀버스 안에는 스키어들이 가득 타 있었다. 그들은 옷마다 번들번들 광택이 났고, 번쩍이는 고글을 쓰고 있었다. 그 세계에 어울리지 않은 우리의 어색한 옷차림. 부모님과 나는 별세계에 도착한 단 세 명뿐인 지구인이었다. 셔틀버스가 한 바퀴 도는 그 짧은 순간에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고, 나에게 부러운 기억이 남았다.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친구 가족들과 스키장이 있는 리조트에 갔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친구들은 아이들에게 스키 강습을 시켰다. 조그만 아이들이 스키를 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무주리조트의 로망을 떠올려 남편에게 배워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하니 남편이 스키를 같이 배우자고 했다. 그 순간 내 머리에 광택 나는 스키복과 번쩍이는 고글을 쓴 모습이 상상되었다. 하얗고 긴 슬로프를 한 호흡에 매끄럽게 내려오는 내가 벌써 그 속에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슬로프를 보니 쭉쭉 미끄럽게 내려오는 스키보다 리듬을 타는 듯한 스노보드가 더 멋있어 보였다. 그런 이유로 스노보드를 선택하고 래퍼처럼 통이 넓은 보드복과 장비를 대여해서 강습받았다. 생각보다 어려운 배움의 길이다. 같이 강습받았는데, 남편보다 더디고 자주 넘어졌다. 그러던 중에 넘어져 있던 스노보더를 피하느라 나도 넘어졌고, 척추에 압박골절상을 입었다. 그 이후로는 다시 넘어질까 무섭기도 하고 아기를 가지면서 스노보드를 타지 않았다.      


 지난겨울에 홍천의 한 스키장에서 스키에 도전했다. 아이들은 전 해에 강습받아서인지 씽씽 내려간다. 일 년만인데도 잘 탄다. 역시 몸은 머리보다 기억력이 좋다. 초급자 코스라고 만만하게 보고 나는 무작정 꼭대기에 올랐다. 아래에서 볼 때는 완만하던 슬로프가 위에서 보니 가파른 절벽같이 느껴졌다. 남편에게 배운 이론과 A자로 멈추는 방법을 생각하지만, 내 몸을 통제할 수 없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압박골절 당해서 페트롤을 타고 내려가던 순간도 생각난다. 몸은 몸의 움직임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고, 다쳤던 순간도 오래 기억하나 보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셀 수도 없다. 결국 스키 장비를 손에 들고 걸어서 내려왔다. 아래에서 A자 자세와 엣지(스키의 날카로운 부분)를 이용해 멈추는 방법을 열심히 연습했다. 다시 도전. 생각과 다르게 꼭대기에만 서면 다리가 통제되지 않는다. 수도 없이 넘어진 끝에 또 걸어서 내려갔다. 머릿속에는 이제 그만 타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포기하려니 아이들이 눈에 보인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면 결과가 좋다고 강조하던 엄마인데, 포기하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다시 슬로프에 올랐다. 머릿속에 주문을 건다. ‘모두 똑같다. 모든 운동은 통제만 잘하면 된다. 통제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세 번째 올라서야 끝까지 스키를 타고 내려왔다. 물론 그사이에도 많이 넘어졌지만, 그래도 혼자서 감동한다. ‘그래 이제 시작이야.’     

 그 사이에 아이들과 남편은 점점 안정된 자세를 찾아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내려가고 올라가며 계속 스키를 탄다. 더디지만 나도 조금씩 스키에 자신이 붙었다. 여전히 엣지를 이용해 멈추기가 쉽지는 않지만, A자 자세는 잘 유지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훌쩍 간다. 어느새 등록한 다섯 시간이 지났다. 다섯 시간 동안 달랑 다섯 번밖에 타지는 못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한다. 아이들은 이제 S자로 내려가는 방법을 아빠에게 배워 아름답고 매끄럽게 내려간다. 식사하다가 서로 얼마나 열심히 용기를 내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타게 되었는지 자랑한다. 내가 한마디 했다. 가장 용기가 있는 사람은 엄마라고. 슬로프에 오를 때마다 무섭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인정해 준다. 잘 타지는 못했지만, 아이들이 엄마의 용기를 인정해 주니 오늘의 성과는 있는 셈이다. 비록 여기저기 부딪혀 몸은 고단했지만.    

 

 작년에 스스로 용기에 칭찬했지만, 지금은 스키장 밖에서 아이들과 남편이 내려올 때마다 손을 흔든다. 작년에는 멋모르고 도전했지만, 올해는 넘어질 때의 아픔과 공포,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먼저 떠오른다. 나 또한 넘어진 스키보더 때문에 다쳤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 무주리조트 스키장에 있으니 포도 알맹이가 영글 듯이 오래전 일부터 작년 일까지 생각난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멋지게 한 붓으로 내려오지는 못했지만, 굴러 내려오든, 걸어 내려오든 멋진 스키복을 입고 한번 타봤으니 만족한다. 이제 그때 가졌던 부러웠던 감정을 내려놓는다. 아이들이 매끄럽게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사진을 찍어주는 일. 사진을 찍고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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