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1973년 세밑에 결혼하셨다. 엄마의 외삼촌댁과 아빠의 큰 누나집이 옆집이었단다. 전쟁 때 태어나 가난한 집의 딸인 엄마의 생활력을 눈여겨본 나의 고모가 중매하여 결혼하셨다. 고모의 눈은 정확했고, 엄마는 어디서든 일당백의 장정 몫을 하신다.
아빠의 본가는 부자였지만 아빠는 차남이라는 이유로 논 두 필지만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작정리가 끝난 호남평야가 내가 자란 곳이다. 어디든 네모난 반듯반듯한 논과 그 사이에 길게 포장된 신작로가 있었다. 우리 논에서 지평선 너머 보이는 것은 미륵산이던가 김제 너머의 이름 모를 산이다. 논 옆으로 지나는 철도도 일제 강점기에 놓였다. 신작로에서 쌀을 모아 춘포역에서 군산으로 철도로 나르고, 배를 통해 일본으로 우리의 쌀들은 수탈되어 나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필지’ 단위로 논을 세서 ‘필지’가 편하다. 한 필지는 여섯 마지기이고 1,200평이다. 결혼하고 큰 동서가 부모님 논이 몇 마지기라고 해서 갑자기 필지를 마지기로 계산을 했던 기억이 난다. 오십 년 전에 두 필지를 씨앗 삼아 평생 농부의 길을 걸으셨다. 지금 칠십이 넘어 노인이 된 부모님은 여전히 땅만 바라보고 사신다. 올 겨울에도 보리도 심고 밀도 심고 풀도 심었다. 오십 년 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결같은 생활에서 농사는 천직이 되어 버렸다. 논은 한 번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다.
삼 남매가 의견을 모았다. 타지에 사는 동생과 조카도 시간 맞춰서 고향 집에 왔다. 장소는 친정집 근처 한우집. 잔칫날이니 나는 부산 집에서 잡채와 육전을 준비했고, 남편은 축하 현수막과 방어회를 주문하고, 조카들은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준비했다. 그저 식구들 모여 식사만 하는 줄 알았던 부모님은 우리가 준비한 이벤트와 감사 용돈에 너무 기뻐하셨다. 실제 눈물을 흘리지는 않으셨지만, 너무 기뻐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부모님이 너무 고맙다. 타지에 살던 삼 남매가 오래간만에 모여 축하와 안부를 물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번에 수능을 본 둘째 조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여 겸사겸사 흥겨움이 넘쳤다.
나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고마움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다. 부모님은 낮은 물론 밤에도 일하셔서 나는 밤의 무서움에 떨며 뜬 눈으로 부모님을 기다렸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래서 계절을 가리지 않고 개미처럼 일하시는 부모님께 고마움은커녕 “엄마아빠는 일이 먼저”라고 푸념하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부모님의 노력이 우리를 위한 것이고, 충분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나보다 키가 작아진 부모님은 여전히 나의 뒷배라는 것을. 천성적으로 예민한 나는 음식에 까다로웠다. 특히 보리를 목에 못 넘겨 여덟 살의 나는 단식투쟁을 했었고, 결국 그 뒤로 우리집밥에서 보리는 사라졌다. 내가 오른손을 다쳐 수술하느라 입원을 한 적이 있는데, 병원밥은 영양식이라고 밥에 보리쌀이 섞여 나왔다. 엄마는 다 큰 딸 앞에 앉아 밥에서 보리를 식사 때마다 빼주셨다. 당연했던 엄마의 노고는 마침 문병 온 친구가 보고 말해서 알았다. 물론 그 뒤로도 퇴원할 때까지 엄마는 보리쌀을 빼야만 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린 나‘와 그 앞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많이 본다. 어쩌면 육아가 여전히 즐거운 이유는 부모님을 이해하는 시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올 초부터 가족여행을 고민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에서 모였다. 하고 싶었던 큰 잔치는 아니지만, 서로가 축하의 마음으로 가득하니 그것에 만족한다. 2023년이 행복하게 저문다.
그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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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이가 박힌 거친 손
황무지보다 거친 발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는 그는
나의 아버지이다.
새벽별은 그의 친구.
봄에는 목동이 그를 반기고
여름에는 백조가 그를 맞이하고
가을에는 염소가 길라잡이를 한다.
천분天分이 천분千分이 되어
하루를 천리마처럼
질주하는 그에게
삶의 나이테가 새겨진다
가슴에 가족을 품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
반짝반짝 빛내며
오늘도 그를 안내하는 시리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