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계간지 『여기』 59호 겨울호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 있다. 모임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인터넷 카페에서 알게 되었다가 나중에는 직접 만나서 교류하였는데 카페에서 사용하는 별칭으로 불렀다. 그중에 한 명이 ‘루시디’라는 별칭을 사용했는데, 자기가 처음 인터넷 계정을 만들 때 『한밤의 아이들』의 저자 루시디라는 이름을 들었고, 마음에 드는 이름이라 그 뒤로 쭉 쓰게 되었단다. 마침 작년에는 살만 루슈디(루시디)가 노벨문학상을 받느냐 마느냐 하며 『한밤의 아이들』이 재조명되고 있었다. 세계 3대 문학상 중의 하나인 부커상을 세 번이나 받은 『한밤의 아이들』에 대해 서로 궁금증이 생겼고, 함께 읽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음 책방」이라는 독서 토론모임이 만들어졌다. 『한밤의 아이들』과 『잉글리쉬 페이션트』와 『데미안』을 거쳐 이번 가을의 책은 공자님 어록집인 『1일 1강 논어 강독』이었다.
『논어』의 첫 시작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이다. 공자께서는 ‘배우고 늘 익히니 이 또한 인생의 기쁨이 아니겠는가?’라며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논어』의 끝은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부지명 무이위군자야, 부지례 무이립야, 부지언 무이지인야)”로 되어 있다. ‘운명을 모르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모르면 사회에 나설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라는 뜻이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쓰신 책이 아니고 제자들이 공자의 어록을 모아 만든 책이라 순서가 체계적이지 않고 내용이 반복되는 구절도 여럿 있다. 하지만 제자들이 느낄 때 공자는 좋은 내용을 배워 몸에 익힌 후에 그것을 제대로 알아 어디에든 사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나 보다. 그래서 제자들은 『논어』를 정리하면서 배울 학(學)으로 시작하여 깨달을 지(知)로 마무리한 것 같다. 『논어』에는 인(仁), 지(知), 예(禮), 의(義), 덕(德), 충(忠)의 중요성이 매번 강조되었다. 이런 도(道)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하고, 알음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에 익혀야 한다. 결국 진심을 담아 최선을 다한다면, 모든 것은 내 것이 될 것이다. 『1일 1강 논어 강독』을 덮었을 때 공자님에게 배운 것은 ‘진심’이었다.
지난봄부터 차 선생님께 친구들과 같이 한 달에 한 번 차를 배운다. 선생님께서 처음에 차를 배우러 오라고 하시면서 ‘좋은 차를 마신다고 생각하고 와.’하고 하셨지만,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잡아주시며 차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셨다. 손수 시범을 보이신 행다(行茶 : 차를 내는 방법)는 한 붓으로 그려지는 아름다운 차인의 모습이었다. 선생님께 배운 대로 하지만, 우리는 피노키오처럼 온몸이 삐거덕거리며 관절 관절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내가 나이도 가장 많고 모임의 주체로 있었기 때문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집에서 다기를 가지고 연습했다. 선생님께서 많이 부드러워졌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다도의 세계는 세밀하면서 섬세했다. 두 손을 모으는 인사부터 찻자리 예절까지 어느 순간 나의 몸은 반듯해지고 있었다.
오늘 나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 대해서 크게 깨달았다. 아침에 차를 우려 남편에게 한 잔 따라주었다. 지난 여러 번의 다도 수업에서 배운 몸가짐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다관을 잡은 손에 예가 느껴지고, 소리와 찻물의 양을 절제하며 찻잔에 차를 따른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구나!” 마음속에 작은 흥분이 인다. 열심히 배우고 연습한 성과가 자연스레 몸에 밴 것이다. ‘배우고 익혀 그것이 몸에서 우러나니 얼마나 기쁜가?’ 옆에서 공자님이 칭찬해주시는 기분이다. 예(禮)란 것이 고차원적인 어떤 예법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본질이다. 행다를 연습하기 위해 손을 모으고, 찻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게 하며 차를 마실 때 후루룩 소리를 줄인다. 이것은 실생활에 그대로 적용된다. 식사하면서 수저 부딪히는 소리를 줄이고, 음식을 먹을 때 오물오물 조용히 먹는다. 두 손은 언제나 가지런히 모아 손이 방정맞게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나도 차인으로서 또는 예를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한 발을 내디딘 셈이다.
『논어』를 읽고 나니 무슨 책이든 원전을 기본으로 해서 읽어야 그 작품의 가치를 알 수 있음을 다시 느꼈다. 내가 『논어』를 읽지 않았다면 공자에 대해서 형식에 얽매인 책상물림으로 오해를 했을 것이다. 『논어』 속의 공자님은 아주 마음이 따뜻하고 실용적이며 사람에 대한 신뢰가 넘치는 사람이다. 공자의 시대는 주나라의 세력이 쇠퇴하고 그사이에 제후들이 난립하면서 도(道)가 무너지고 있었다. 세계의 질서가 파괴되고 힘 있는 자가 으뜸이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공자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여 따뜻하고 질서가 있게 백성을 잘 돌보는 세상을 만들려 노력하셨다. 그러나 후대의 철학자와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경직되고 비실용적인 사상으로 만드는 바람에 공자는 오해받게 되었다. 조선의 많은 정치가 역시 철저히 본인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했고, 이것은 공자께서 그토록 경계한 소인(小人)의 길이었다. 이 시대의 정치가들도 『논어』를 정독하고 현대사회에 맞게 재해석하여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였으면 좋겠다.
『논어』를 한 번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어 항상 공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야겠다. 여러 번 우려내도 진한 향과 맛이 전해지는 차처럼, 공자의 말씀은 읽을수록 진한 향이 날 것 같다. 볕이 좋은 오후에는 진한 보이차를 우리련다. 오늘 내가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참뜻을 깨달았듯이, 다음에는 “欲訥於言而敏於行.(욕눌어언이민어행)”의 의미를 깨우치고 익혀서 ‘말은 과묵하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