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길위에 김대중』을 보고 나서
『길위에 김대중』을 보았다. 영화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성녹음과 사진과 영상과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24년에 태어나서 1987년 광주방문까지를 다룬다. 일단 나는 편집과 음악에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보통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갖는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잘 만들어졌다. 적당히 리듬이 빠른 음악이 바닥에 깔려 내내 박진감을 주었다. 어느새 2시간의 상영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2부’ 예고에 깜짝 놀랐다. 끝없이 선거에 지면서도 패기 있던 사람이었는데,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마음에 빚을 가졌는지 얼굴에 그늘이 생긴 것을 보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번 『길위에 김대중』을 보고 나서야 ‘왜’ 전두환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보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박정희 때부터 조장된 지역감정을 전두환이 이용했는지, 김대중을 옭아매기 위해 광주를 선택했는지 항상 의문이었는데, 대학생 총궐기에 나선 학교가 광주의 학교뿐이었다는 나레이션에 당시의 상황을 알았다.
이번에 『길위에 김대중』을 보며 새롭게 느낀 점을 정리하자면,
첫 번째는 숫자에 놀랐다. 감옥에 있는 기간 동안 읽은 책들의 숫자에, 미국 망명 생활하는 동안 미국 각지를 돌며 연설한 횟수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인동초가 수식어처럼 붙는 사람일지라도, 이렇게 참고 인내하고 쉬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 가능할까. ‘김대중’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심지어 민의원선거도 다섯 번 지고 여섯 번째 당선되었는데, 의정생활을 하기도 전에 5.16 군사 반란으로 바로 의회가 해산되었다.
두 번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인술에 놀랐다. 영화가 시작하고 해운사업에 대해 회상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 초반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사람(직원)을 대하는 자세가 담겨있었다. 최근에 읽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빌려 말하자면, 미시즈 윌슨이 어린 펄롱에게 ‘최선을 끌어내려면 그 사람한테 잘해야 했다.’라고 했던 말과 통한다. 아무런 세가 없던 시절에 권노갑, 한화갑 등의 비서들이 그토록 방방곡곡을 돌며 ‘김대중’을 위해 일한 것은 그분에게서 희망을 보았고, 사람의 가치를 발견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세 번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회의 연설에 앞서 시계를 손목에서 빼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어떤 정책에 대한 설명이라던가 관철하기 위해 무장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보통 무장이면 몸에 무언가를 입는 것이지만, 그분은 시계를 벗었다. 한번을 허투루 사신 적이 없는 분이라 어쩌면 시간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잘나가던 청년 사업가. 그러나 정치를 시작하면서는 고난이 계속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계속 패배했지만, 그럴수록 더 단단한 나무가 되었다. 마치 하의도의 구슬 나무처럼.
우리 집에는 구슬 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신기한 번식능력을 가진 구슬 나무는 계속 새끼를 쳤고, 베란다와 화분의 한계를 벗어나 버렸다. 결국 세 그루를 친정 농장에 갖다 심었다. 땅의 힘이 무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화분에 있는 구슬 나무는 나무젓가락처럼 가느다랗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구슬 나무들은 어느 순간 키가 훌쩍훌쩍 자라고 울창해졌다. 구슬 나무를 볼 때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2018년 5월에 신안 하의도와 목포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주제는 ‘김대중’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행동하는 양심’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그래서 그분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 생가를 찾았다. 흙벽과 초가지붕으로 된 생가는 1999년에 복원되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 추모관에 들러 인사를 올리고 마당에 세워진 전시물들을 보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에 고향에 방문하셨고, 그해 돌아가셨다. 다음은 하의도를 방문하고 마지막 일기(「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에 쓰신 글이다.
‘14년 만에 고향 방문
선산에 가서 배례.
하의대리 덕봉서원 방문
하의 초등학교 방문, 내가 3년간 배우던 곳이다.
어린이들의 활달하고 기쁨에 찬 태도에 감동했다.
여기저기 도는 동안 부슬비가 와서
매우 걱정했으나 무사히 마쳤다.
하의도민의 환영의 열기가 너무나 대단하였다.
행복한 고향방문이었다.’
생가 옆에는 <해양테마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생에 대해 투쟁-기억-평화의 주제로 벽이 전시되었다. 한가로운 봄날 마당으로, 공원으로, 그 옆의 염전으로 소풍 나온 동네 사람들처럼 거니는데, 해설사 선생님이 다가오셨다. 그분은 우리 아이들을 보며 반가워하셨고, 아들의 손에 씨앗 몇 개를 주며 구슬 놀이를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아이의 호기심 어린 눈을 보며 심으면 싹이 날 거라고 하셨다. 우스갯소리로 여기며 하의도 여행을 마치고 목포의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까지 들린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동그란 씨앗을 내밀며 어서 심자고 했고, 싹이 나지 않을 거라는 엄마 말은 듣지도 않는다. 선생님이 싹이 난다고 했으니 날것이라고 했다. 결국 조그만 화분에 씨앗을 몽땅 심고 며칠을 관찰했지만, 싹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었다. 그해가 저물기 직전의 어느 날 화분에 조그만 이파리가 나오더니 금세 자란다. 하나가 나오기 시작하니 순식간에 작은 화분을 고사리처럼 가냘픈 줄기가 덮어버렸다. 순간 이것은 무엇인가 생각하다가 얼핏 구슬 나무임이 떠올랐다. 반년을 땅속에서 숨죽이던 구슬 나무가 싹을 틔우고 나무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보란 듯이 아들은 잘난 척했다. 더 신기한 것은 원래 예닐곱 개가 나는 것이 정상인데, 어느 순간 새롭게 새끼를 친다. 구슬 나무는 최고로 열다섯 개까지 늘었다. 결국 화분과 화분을 옮기다가 한계를 느끼고 친정에 세 그루를 심었다. 마음에는 자랑스러운 구슬 나무를 이희호 여사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그분도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황토색 초가집 뒤로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구슬 나무였는가보다. 다른 나무는 신경 쓰지 않고 인동초만 찾아서 보고 왔는데, 좀 아쉽다. 6년째 우리 집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는 구슬 나무를 보며 항상 ‘김대중’을 생각한다. 인고의 어려움 속에서 결국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보고 쑥쑥 자라는 구슬 나무의 모습이 김대중 전 대통령 을 닮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 망명 시절 강연과 인터뷰하러 다니며 ‘난 늘 길 위에 있었다.’라고 하셨다.
이제 『길위에 김대중』 2부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