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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수미 Jan 29. 2024

『삼국유사』 속의 수로왕비 발자취를 찾아서

_김해의 금관가야 이야기

  

  일연스님은 파사석탑을 보고 “이 탑은 네모난 4면에 5층으로 되었으며, 돌에 조금씩 붉은 반점이 있는 데다 질감이 아주 부드러우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돌이 아니다.”라고 한 후에 찬가를 지었다.  

   

    “석탑 실은 붉은 돛배 붉은 깃발도 가볍게

    신령께 빌어 험한 파도 헤치고 왔네.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 도왔으랴.

    천 년 동안 남쪽 왜국의 성난 고래를 막아주었네.”     


  『삼국유사』를 보면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신의 계시를 받은 부모님의 명령으로 바다를 건너 가락국의 수로왕에게 시집왔다. 배를 타고 출발했는데, 해신의 노여움으로 배가 고향으로 되돌아가자 아유타국의 왕은 석탑을 배에 싣고 가라고 했다. 그 석탑이 지금 수로왕비릉에 있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최근에 조사해 보니 실제 파사석탑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고, 인도에서는 흔한 돌이라고 한다. 신화가 역사가 되는 순간이다. 파사석탑을 보기 위해 『삼국유사』를 손에 들고 길을 나선다. 매서운 추위가 지나가고 봄볕과도 같은 따사로움이 가득하여 발걸음도 가볍다.     

  『삼국유사』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맨 처음 찾은 곳은 망산도 유주암이다. 어느 날 수로왕은 신하들에게 명을 내려 망산도에 가서 귀인을 맞이하라고 했다. 그 귀인은 서남쪽에서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 귀인이 허황옥 공주이다. 부산시 강서구 송정동에 있는 아주 조그만 섬이 바로 망산도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갈매기의 놀이터가 된 더 작은 바위섬이 유주암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주암은 허황옥 공주가 타고 온 배가 뒤집어져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방문했을 때 출입문이 닫혀 망산도에 직접 들어갈 수 없어서 아쉬웠다. 이천 년 전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망상도는 햇빛을 단단히 받고 잠들어 있다.

  근처에 유주비각이 있다고 해서 유주비각까지 찾았다. 비각은 ‘대가락국태조왕비보주태후허씨유주지지(大駕洛國 太祖王妃 普州太后 許氏 維舟之地)’이라 쓰여있다. 김해 허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으로 그들의 시조모를 기리기 위해서란다. 왕과 왕비 사이에는 열 명의 아들이 있었다. 왕비는 두 명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남기고 싶다고 하여 수로왕은 그들에게 김해 허씨를 주었다. 이역만리에서 낭군을 찾아온 허황옥 공주는 시대를 뛰어넘는 당찬 성정을 가졌는가 보다.      

  다음 목적지는 흥국사이다. 『삼국유사』에 ‘산기슭에 장막을 쳐 임시 거처를 만들’어 ‘맑은 밤을 두 차례 지내고 밝은 낮을 한 차례 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수로왕과 왕비가 초야를 치른 곳에 절이 들어섰다. 흥국사의 극락전에는 허왕후전이 딸려 수로왕 부부의 극락왕생을 빈다. 허왕후전에 있는 석물에는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계시고, 양쪽으로 코브라 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인도불교의 남방 전래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설명판에 쓰여 있다. 명월산의 작은 절에 잠시 머물며 수로왕과 허황옥 공주를 생각한다. 물도 땅도 낯선 곳에서 황옥 공주는 이곳에서 지낸 첫날이 어땠을까. 열 명의 아들 중에 두 명에게 자신의 성을 주고 싶다는 왕비의 청을 들어주고, 허왕후가 돌아가신 후에 무덤을 높은 곳에 세워 고향인 인도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준 자상한 수로왕 곁이었으니 어린 공주가 편안한 첫 밤을 보냈을 것 같다.     

  드디어 파사석탑이다. 수로왕비릉 오른쪽에 있는 파사각에 파사석탑이 있다. 어린 시절에 재미난 이야기로만 읽었던 『삼국유사』였다. 이제 일연스님이 발로 뛰고 기록해 쓴 책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을 가지고 파사석탑을 마주한다. 마치 산길을 걷다가 산신에게 돌 하나 올린 것처럼 앙증맞은 돌탑이다. 정말 신기한 붉은 돌이다. 붉은 돛, 붉은 깃발, 붉은 석탑. 아마 명월산 산신에게 폐백을 바쳤다는 황옥 공주의 비단 바지도 붉은색일 거라고 상상해 본다. 파사석탑은 원래는 호계사라는 절에 있던 것을 고종 10년에 왕비릉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1993년에 전각을 지어 바람으로부터 보존하고 있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볕이 파사탑을 내리쬔다. 석탑의 하얀 부분은 더 하얗게, 붉은 부분은 더 붉게 도드라진다. 황옥 공주는 189년에 157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 뒤로 십 년 후에 수로왕도 승하했다니 신이 맺어준 부부는 오래오래 해로하였다. 파사석탑을 보고 있으니 허왕후와 파사석탑은 오랜 동무 같다. 시간이 흘러도 그들은 멀리 있는 고향을 같이 바라본다.     

  수로왕비릉에서 참배하고, 이제 수로왕릉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수로왕릉에서 우리를 처음 맞이한 것은 하마비(下馬碑)이다. 신분이 아무리 높더라도, 설사 왕일지라도 이곳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 가야는 멸망했지만, 그 뒤의 왕들이 수로왕을 높이 존경했음이 보인다. 수로왕은 158세의 나이로 승하하셨다. 『삼국유사』에 수로왕릉 조성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나와 있다. 수로왕에게도 인사를 올리고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두 분의 영정 그림을 뵈었다. 김해시에서 가야 시대의 유물을 배경으로 1990년대에 영정을 그렸다는데, 두 분 모두 참으로 인자해 보인다. 『삼국유사』에 “나라 안 사람들이 마치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비통해했다.”라며 다음 왕인 거등왕부터 대를 이어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금관가야가 멸망한 후에는 신라왕이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게 했으니 수로왕과 왕비의 공덕이 오래오래 높이 받들여졌나 보다.     

  수로왕릉을 나오니 내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장군차>이다. 고려 충렬왕이 김해에 들렀을 때, 금강사 차나무를 “장군차”라고 명명하여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진다. 학자들은 이 장군차를 황옥 공주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나 중국의 차가 소엽종인 것에 비해 이 장군차는 인도에서 흔한 대엽종이다. 언젠가 차 선생님과 해운대 동백섬을 산책할 때 황옥공주 인어상을 보며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경상도 지방에는 처녀가 시집갈 때 찻씨를 가지고 가는 풍습이 있었는데, 차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 오래오래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으며, 그 유래가 수로왕비라고 하셨다. 장군차를 보니 마음 한편에 이천 년의 차의 향기가 전해진다.      

  가야 여행의 마지막은 국립김해박물관이다. 마침, 며칠 전에 상설전시관이 멋지게 “그랜드 오픈”했다. 최신의 따끈따끈한 박물관은 미디어 아트가 엄청 많아 관람객의 이해를 돕지만, 가끔 산만한 느낌도 든다. 가야 이전 사람들의 흔적은 구석기시대까지 간다. 다듬어지지 않은 돌들과 항아리를 거쳐 금관가야 시대에 오면 멋스러운 가야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삼국유사』의 기록이 눈에 띈다. 가야의 아홉 우두머리가 모여 왕을 맞이하며 부른 <구지가>이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일연스님은 직접 발품을 돌며 방방곡곡을 탐사하고 전해져 오는 향가를 기록했고, 때로는 스스로 찬가를 바쳤다. 일연 스님이 그리스의 헤로도토스와 비교되는 것은 당연하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의 강력한 침입도 막아낸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결국 자기들끼리 전쟁으로 피폐해진 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역사』를 썼다고 한다. 일연스님도 『삼국유사』를 작성하게 된 배경이 몽골침입으로 황폐해진 국토와 백성의 지친 마음, 그리고 점점 문란해져 가는 고려 불교에 대해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다.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만들어낸 위대한 작품들이다. 우리는 수천 년 전의 역사를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으니 일연스님이 참으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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