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필드 하우스

웨스트 햄프턴, 롱 아일랜드, 뉴욕

by Spero

"웨스트에그에 살고 계시다고요?"
그녀는 무시하는 투로 말했다.
"그곳엔 제가 아는 분이 있어요."
"나는 아직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개츠비라는 분을 아실 텐데요."
"개츠비라고?"
데이지가 물었다.

(스코트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1880 시필드 하우스, 웨스트햄프턴


1992년 미국 초행 당시 롱아일랜드 웨스트햄프턴에 일주일간 머물렀다. 엘시 콜린스 부인이 운영하는 B&B였는데, 내게 이 분은 언제부터인가 가족 같은 사람이 됐다. 콜린스 부인은 독일계 이민가의 후손으로 유치원 교사직에서 은퇴한 뒤 이곳에 둥지를 텄다. 그리고 70년대부터 B&B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1년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그 녀는 태극무늬 문양이 그려진 부채를 들고 나를 마중 나왔다. 10년 전 첫 번째 방문했을 때 한국 전통 문양이라면서 내가 선물했던 바로 그 부채였다. “오랜만이에요, 미세스 콜린스” 하니까, 그냥 엘시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며 웃었다.

묵은 일기장 속에서 그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010915(토)

10년만이다.

맨하튼 렉싱턴 애브뉴와 3번 애브뉴 사이 41번가에 있는 hampton jitney 정류장에서 12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탓다.

말이 정류장이지, 허벅지가 유난히 굵은 백인 여자 애가 혼자서 앉아 있다.

우리 식으로 본다면 버스 안내양이다. 자기 피앙세가 있는데, 자기네 동네 사우스 햄프턴에 가보더니, 괜히 돈들여 유럽 같은 데 가는 사람들이 정말 멍청한 사람들이라며, 정말 근사한 동네라구 했다는 얘기부터 WTC 무너진 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얘기에 이르기까지 수다를 떨었다.

제대로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별로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중간 정류장에 내려보기도 처음이거니와, 미국의 버스 정류장이 이토록 허전하리만치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그저 낯설기만 했다. ‘천국보다 낯선’ 영화에 나왔던 한 장면같다.

마중 나온다던 엘시 모습이 보이지 않아, 혹시 잘못 내리지나 않았나 걱정스러웠지만 오겠거니 생각하면서 10여분 쯤 기다렸다. 함께 내린 은발의 할머니 한 분이 택시를 부른다. 내게 택시 함께 타지 않을래, 하고 묻길래, 누가 마중나오기로 했어요, 했다. 이 타지에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기다릴 사람이 있다는 것, 혹은 기다려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때론 정말이지 눈물날 만큼 행복한 일이다.

택시가 왔고,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할머니가 떠났다.

이윽고 먼발치서 하얀색 승용차가 달려오는 게 보인다.

소실점같은 아득히 먼곳으로부터 한대의 차량이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

차량색만큼이나 하얀, 백발을 날리며 내게 손을 흔든다.

엘시.

태극무늬 부채를 들고 나왔다.

인사동에서 산 태극문양이 그려진, 10년 전 내가 선물로 준 부채였다.

하얀 폴라 셔츠왼쪽 목부분에는 태극기와 로터리 마크를 교차한 뱃지를 달았고.

9년 6개월, 거의 10년만이다.

아, 정말이지, 강산이 변한다는 시간이었을텐데, 그 모습 그대로이다. 주름이 좀더 깊어진 것 빼고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가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좋아보인다" 하고 엘시가 말했고, "마찬가지네요" 하고 내가 말했다.

배고프냐고 묻더니, 집에 잠깐 들려 가방 두고 먼저 밥먹으로 가잔다,

그림같은 곳이다.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도로를 따라 한 동안 달리자 나타나는 seafield house. 그래, 바로 이 곳이지. 10년 전이나 다름 없었다. 거실에 놓여있는 피아노와, 벽난로 하며, 2층에 있는 kim's room, crag's room 모두 그대로다. ‘peace to all who enter here' 이라고 쓰여진 나무판이나, 곳곳에 놓여있는 헝겁으로 만든 인형들하며, 고색창연한, 하지만, 꼬질꼬질하지 않은 방안 장식들이 여전하다, 다만 책이 조금 바뀐 것 같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스미스 소니언 잡지는 그대로 인데, 깜짝 놀란 건 ‘스탠리 큐브릭’ 전기가 있지 않은가! 누가 읽었던 책이었을까?


이후 난 2003년 세 번째 방문을 했고, 2009년 네 번째 방문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머물렀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며, 시골 외할머니집에 온 것인 양 아이들이 좋아했다.


시필드 하우스(seafield house). 이름 그대로 문전옥답이 바다인 셈이다. 1880년에 지어진 이 집은 엘시 콜린스 부인이 주인이 되면서 개조한 뒤 롱아일랜드 웨스트햄프턴의 인기 있는 B&B로 자리매김했다. 19세기 빅토리아풍의 가옥 안에는 고색창연한 앤티크 가구들이 자리 잡고 있다. 푸른빛을 띤 영국 산 도자기, 벽난로가 있는 작은 서고,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와 스탠리 큐브릭 자서전, 무엇보다 손글씨로 쓴 환영 카드하며, 숙소로 이어지는 별도의 계단 등 게스트를 위한 주인의 배려가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시필드 하우스로부터 10여분 정도 걸어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끝없는 해변, 웨스트햄프턴 비치가 대서양을 끌어안는다. 적어도 내겐 롱아일랜드 하면 웨스트햄프턴, 웨스트햄프턴 하면 롱아일랜드다.


롱아일랜드


롱아일랜드는 명칭 그대로, 기다랗게 이어진 섬, 우리나라 제주도 면적의 두 배 반 정도 크기의 길고 긴 섬이다. 뉴욕 주의 남동쪽 해안에 있는 면적 4,463 ㎢, 최대 너비 37km, 길이 192km의 기다란 섬으로 대서양에 면해 있다. 롱아일랜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네티컷 주와 마주 보고 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뉴욕에 도착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루트가 바로 롱아일랜드해협이다. 롱아일랜드 해협은 영어로 long island sound로 표기된다. 처음에 나는 long island sound를 로컬 밴드 수준으로 이해했었다. 왜 long island에 sound가 붙어있느냐고 물어도 현지인들은 속 시원히 대답해주지 못했다.


sound는 만을 뜻하는 bay나 cove보다 일반적으로 그 규모가 훨씬 더 크다. sound>bay>cove 순이다. long island sound에 오이스터 베이가 있고, 그 안에 오이스터 베이 코브가 있는 식이다. 해협을 뜻하는 또 다른 단어인 strait는 거대한 육지와 육지 사이에 놓여 두 개의 바다를 연결한다. 동해와 중국해를 연결하는 대한해협,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는 보스포루스 해협, 북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도버해협 등이 그렇다. 경계를 통한 구역 설정이란 측면에서 Strait는 Sound에 비해 스케일이 훨씬 크다. 일례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경우,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구분 짓는다. 이에 비해 Sound는 섬과 대륙 사이에 놓인 좁은 바닷길을 의미한다. 만을 뜻하는 Gulf와 비교할 때, 대륙 쪽으로 훨씬 좁고 깊게 파고 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대륙 쪽으로 면해 있는 바다의 형상을 놓고 볼 때 Gulf는 펼쳐진 우산, Sound는 접힌 우산의 모양을 연상하면 쉽다. 그러나 말이 좁은 바닷길이지, 롱아일랜드 해협 역시 끝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거대한 해양이다.


롱아일랜드는 행정적으로는 뉴욕주에 속하는 4개 카운티로 나뉜다. 서쪽은 킹스 카운티와 퀸스 카운티로 킹스는 우리에겐 브루클린으로 알려져 있다. 맨해튼에서 롱아일랜드를 연결하는 다리가 그 유명한 브루클린 브릿지다. 뉴욕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통하는 브루클린 브릿지는 총연장 1,053m에 이르는 최초의 철 케이블 현수교로 맨해튼에서 롱아일랜드로 들어가는 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 속에도 자주 등장한다. 미국 이민사의 명암을 조명한 갱스터 무비 ‘원스 업온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보여준 웅장함 뒤의 그 쓸쓸한 실루엣이라니...


퀸스 플러싱에는 한 때 뉴욕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었지만 최근엔 동쪽으로 많이 이주했다. 한인 커뮤니티의 경제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다. 롱아일랜드는 동쪽으로 갈수록 집값이 비싸진다. 바로 이 동쪽에 낫소 카운티와 서포크 카운티가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롱아일랜드 하면 서쪽 퀸스와 킹스 카운티를 제외한 동쪽의 두 카운티, 낫소 카운티와 서포크 카운티 두 곳을 의미한다. 두 카운티 가운데 서포크 카운티는 롱아일랜드의 동쪽 2/3를 차지하고 있다. 이 면적 가운데 와이너리 등 주로 농장 지대가 포진해 있는 북쪽의 노스 포크, 그리고 해안가가 펼쳐지는 사우스 포크가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이 사우스 포크 지대가 햄프턴이라 불리는 천혜의 휴양지대다. 서쪽 맨해튼 섬에 가깝게 위치해 있는 코니 아일랜드나 존스 비치 등이 짧은 휴식을 취하기 위한 뉴요커들로 북적인다면 동쪽 햄프턴 일대는 좀 더 깊고 긴 휴가를 즐기기 위한 해변의 길손들로 반짝거린다.


햄프턴 비치


끊임없이 이어진 해안, 비치 채널 드라이브라는 도로명이 있을 정도로 해안 도로는 롱아일랜드를 관통한다. 2백여 km 가까운 기나긴 해안도로가 맨해튼에서 브루클린 다리 건너 대서양에 면한 몬탁에 이르기까지 길고 길게 이어져 있다. 이들 비치 가운데 햄프턴 비치는 롱아일랜드를 상징한다. 동과 서를 나누어 뉴욕 쪽은 웨스트햄프턴, 대서양 쪽은 이스트햄프턴이 자리 잡고 있다. 롱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잃어버린 세대’의 아메리칸드림을 좇는 ‘위대한 개츠비’에는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가 등장한다. 흔히 ‘골드 코스트’라 불리 우는 곳에 위치한 부촌이다. 이스트에그는 웨스트에그에 비해 훨씬 더 부티 나는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백만장자와 억만장자의 차이를 놓고 삶을 얘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욕망과 부의 크기를 잰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이스트햄프턴 역시 웨스트햄프턴에 비해 한결 더 럭셔리한 해변 별장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 뮤지션 빌리 조엘과 폴 사이먼, 디자이너 랄프 로렌과 캘빈 클라인,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배우 로버트 드 니로 등 억만장자들의 별장이 바로 이 햄프턴 비치를 끼고 들어서 있다. 눈코 뜰 새 없는 맨해튼의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브루클린 다리 건너 달려오는 곳, 롱아일랜드는 뉴요커들의 욕망과 야망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하는 휴식처이다. 고인이 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바로 이 끝없이 이어진 햄튼 비치의 끝자락인 몬탁에 별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별장은 경매에 부쳐져 5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6백억 원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해안가를 따라 말 달리며 대서양 바람맞기, 올드 몬탁 하이웨이 끝자락에 자리 잡은 엄브렐라 비치(Umbrella Beach)에서 밤하늘 별 보기. 독립기념일에 펼쳐지는 스타스 오버 몬탁(Stars over Montauk) 불꽃 축제, 곳곳에 펼쳐지는 길거리 전시와 벼룩시장 등 볼거리, 즐길거리도 쏠쏠하다.


몬탁


몬탁의 명물은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몬탁 등대다. 높이 33.7m, 5초마다 한차례 씩 깜빡이는 등대 불빛은 30km까지 그 빛을 발사한다. 대서양 건너 신천지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기념비적인 조형물이다. 당시 유러피언들에게 뉴욕은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는 새로운 제국(Empire State), 몬탁 등대는 바로 그 뉴욕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에게 대서양의 거친 항해가 끝났음을 알리는 희망의 불빛이었던 셈이다. 뉴욕주의 첫 번째 등대이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등대로 기록돼 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지시로 1796년 건립됐고 2012년 미국 국립유적지로 지정됐다. 19세기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케네디가(家) 역시 이 몬탁 등대의 불빛을 길잡이 삼아 신대륙으로 들어왔다. 롱아일랜드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굶주림을 피해 대서양을 건너온 이민자의 후예가 개척지의 대통령이 되고, 그의 꿈이 불발된 곳에 또 다른 세계를 향하는 국제공항이 자리 잡고 있는, 아메리칸드림의 전형을 보여주는 롱아일랜드, 그러나 이 것은 곧 인디언 멸망사의 또 다른 아픈 역사이기도 하다. 몬탁은 케네디 일가가 이주해오기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을 지켜온 인디언 원주민 몬타켓(Montaukett)에서 유래됐다.

엘시


지난해 시필드 하우스 안주인 엘시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령으로 더 이상 B&B 운영이 어렵게 됐다며 뉴욕주 북부 킹스턴에 있는 요양 시설로 이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홀몸으로 B&B를 운영하기에 벅찼던 모양이다. ‘바이~’ 하면서 전화를 끊는 엘시 음성에 햄프턴 비치가 오버랩 됐다. 지난해 초 벚꽃 필 즈음 전화를 걸었다.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라는 녹음이 반복됐다. 그러더니 벚꽃이 진 후부터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는다. 그녀는 올해 여든셋이다. 다섯 번째 롱아일랜드행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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