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찻집의 기억

동해, 젊은 날의 초상

by Spero

동해의 겨울바다.

강릉을 벗어나면 더욱 고적하다.

계엄령이 내려진 80년 동해는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일찌감치 입대한 친구의 부대를 수소문해 찾아간 곳,

강릉 지나 삼척 전쯤에 있었던 그 어느 지점이었더랬다.

동경사 위병소 장교 왈, 친구 면회는 외출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애인이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변 다방 레지한테 티켓 끊어서 애인 역할시키면 외출시켜준다고 했다.

늘 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장교와 다방 레지와의 관계, 혹은 주인 마담과의 관계 등등의 커넥션이 머릿속을 스치긴 했으나

재고의 여지없이 그리하겠다 하고 우린 다방으로 향했다.

이름 없는 찻집의 간판은 그냥 '다방'이었다.

찾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다방은 그곳 하나뿐이었으니까.

우리는 친구의 외출을 성사시켰고,

커피를 마셨고,

인근 주점에서 소주를 마셨고,

젓가락 장단에 진주난봉가를 불렀다.

이등병 친구의 귀가리개털모자를 쓴 레지가 어찌나 희고 곱던지,

우린 그녀를 '백화'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백치처럼 웃기만 했다.


그 겨울바다 동해에 근사한 리조트가 들어섰고

철 지난 바닷가엔 이름 없는 다방 대신 커피 프랜차이즈가 곳곳에 자리 잡았다.

말끔한 커피숍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바다,

흰 파도는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해송은 젊은 날의 초상처럼 푸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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