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결혼한 성자의 마을
아시시로 가는 길은 고적했다.
흐린 하늘에 금방이라도 빗줄기가 이어질 것 같은 날이었다.
난생처음 발 디딘 이탈리아,
첫 목적지로 아시시를 삼은 이유는 이러했다.
"무소유면 소유의 잃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법정)
내 나이 열하고도 서넛 즈음,
법정스님의 이 말씀은 까까머리 중딩의 머릿속을
마구마구 회오리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불혹과 지천명을 지나
이순에 이를 즈음,
딸아이가 새 식구 한 명을 데려왔다.
천주교 성프란체스코 수도원 교육회관에서 혼례를 치렀는데
나는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아이보리 톤이 무척 맘에 들었다.
딸의 손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딛으면서,
무소유의 삶이 주는 가르침이 내 삶을 관통하는구나, 싶었다,
치기 어린 10대를 흔들었던 법정 스님의 울림이
성 프란체스코 성인의 영혼이 깃든 성소에서
다시금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시시를 찾았다.
아시시.
"주여,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크리스천이 아닌 내게 '평화의 기도'로 기억되고 있는
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나고 묻혀 있는 곳이다.
주차를 하고 아시시 언덕을 오르자
후둑후둑 빗줄기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받쳐들자, 웬걸!
금세 비가 멋는 듯 싶더니,
푸른 하늘이 낯빛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이윽고 드러나는 성 프렌체스코 성당의 모습...
그의 일대기는 드라마틱하다.
1182년 금수저 물고 태어나,
방탕한 젊은 시절 보내다가
십자군 전쟁에 참전한 뒤 포로로 1년 간 억류된다.
이후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채 패배자로 귀향하는데...
이 모습,
고개 떨군 패잔병의 상처받은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후 1226년 마흔넷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의 삶은 기도와 청빈, 순결, 복종을 중시하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가치를 지켜나갔다.
수녀(Suore)의 집,
카푸친 작은형제회(Frati minori cappuccini),
프란체스코는 지금도 아시시의 골목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심지어 레스토랑 벽면에 붙어 있는 부조물에서도...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성자 프란체스코'에서 이런 스케치를 전하고 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여,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고 있네.
그리스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니 어서 일어나게.
세상이 무너지지 않도록 자네의 등으로 떠받치게."
('성자 프란체스코' / 카잔차키스)
프란체스코가 세속에 물들어 있을 때,
꿈속에서 다미아노 성자를 만난 일화인데,
이 나이 먹도록 여전히 나는 그런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으니...
'가난과 결혼한 성자'의 마을,
아시시의 정경이 지금도 꿈결처럼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