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단상

사랑니에 대한 몇 가지 짧은 생각들

by Spero

나이를 먹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이다. 몸무게도 줄고, 키도 줄고, 머리숱도 줄어든다. 소갈머리도 좁아진다. 불편하고 불안한 것은 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여지없이 잇몸에서 피가 나온다. 시큰시큰한 치통이 광대뼈를 타고 올라 뇌까지 침투하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퇴직 후 출근하듯 치과를 찾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다니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이미 두루두루 알려져 있었으나 내가 몰랐던 사실일 거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유홍준 선생께서 각색한 왜 그 유명한 문장 있지 않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원문 ;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 兪漢雋)


내게 사랑니가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좀 더 정확히는 내 사랑니는 숨어 있었다.

보이지 않았으니 없다고 생각한 것인데...

Seeing is believing, 백문이 불여일견, 그러나 인간이 확인한 사실은 얼마나 미욱한 것인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 생각했으니...

윗 문장을 내 경우에 비춰 바꿔 써본다면,

안 보이면 없다 하고

없다 하면 안 보이나니

그때 보지 못한 것은 어느 날 보게 되리라.

사랑니,

말 그대로 사랑에 눈뜨는 시기에 나타나는 일종의 사춘기 심벌이다. 낭랑 18세를 전후해 나타난다.

일반 성인의 치열은 윗니 14개, 아랫니 14개를 포함해 모두 28개, 그 28개 이후 맨 마지막에 솟아나는 이가 바로 사랑니다. 위치상 잇몸 상하좌우 맨 끝쪽이다, 모두가 사랑니를 갖고 있지는 않다. 누구는 하나만 있고, 누구는 넷 모두 있다. 드러나는 모습도 가지각색이다. 일부는 누워 있고, 일부는 어긋나 있다. 잇몸에 숨겨져 있기도 하다. 아예 없는 사람도 있다. 통계적으로 약 7%는 사랑니가 없다. 내 경우, 윗 치열 양쪽 끝에 두 개 있었다. 이번에 발견했다. 그동안 잇몸 안에 있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썩지 않고 그래서 아프지 않았다. 뽑지 않고 지금껏 잘 살아왔다.

사랑니는 영어로 wisdom tooth, 한자로는 지치(智齒), 말 그대로 지혜로워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나타나는 이를 지칭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이 지혜로부터 비롯한다는 데 동의하시는가?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두 배우가 주고받는 명대사를 보자.


"헤어지자." (이영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유지태),


라면 먹고 가라며 있는 관심 없는 관심 총동원한 뒤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하는 연인이야 그렇다 치자. 그 앞에서 사랑의 불변함에 대해 되묻는 순진한 청춘, 요즘도 있을까?

이런 식의 아귀가 맞지 않는 대화는 그러나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또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사랑니로 인한 치통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사 선생께서 말씀하신다.

"보이지 않는 사랑니가 두 개 있으십니다. 그동안 잇몸에 숨어 있었습니다.썩지 않고 잘 있었네요."


숨어 있던 사랑니 두 개, CT 사진 속 윗니 양 끝에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나머지 두 개를 상상했다. 혹시 내 마음속 어딘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남들을 물고, 뜯고, 씹어온 마음속의 이빨들. 보이지 않을 테니, 남들이 알아차릴 리 없었을 테고 그래서 뒷담화의 비밀병기로 시시때때 써 온 바로 그 마음속의 사랑니 말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자행한 숱한 비행들은 고해성사의 1순위에 놓아야 할 나의 업(業) 일 터이다.

해서 나는 앞으로 이렇게 살기로 했다.

CT로도 나타나지 않는 마음속의 사랑니를 위해 가급적 말수를 줄이자. 반세기 넘도록 보지 못한 내 사랑니는 썩지 않았다. 그러하니 내 맘속의 사랑니 역시 드러낼 일이 아니지 않은가.

칼집을 벗어난 칼은 이미 칼이 아니다.


사람은 변하고, 드러난 사랑니는 썩는다.

그럼에도 사랑은 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사랑니 또한 썩지 않는다.

사랑니, wisdom tooth, 지치(智齒), 나는 언제쯤 지혜로워질 것인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위대함에 견주어 보면.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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