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단상

윤정희

망각의 강을 건너간 우리들의 여배우

by Spero

배우 윤정희 선생이 돌아가셨다.

설 연휴 시작부터 찬바람 부는가 싶더니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게 하는 뉴스가 전해졌다.


난 그녀를 15년 전에 만났다.




구부정한 백건우는 피아노 흰 건반같은 윤정희와 함께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인터뷰이가 아닌 데 스튜디오 안까지 함께 들어오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이다.


그런데 윤정희는 마치 듀엣으로 인터뷰 하러 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두 분은 늘 함께 다니는구나", 생각했다.


'ON AIR' 빨간 큐 사인이 깜빡 거리자, 스튜디오를 이리저리 둘러보던 윤정희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냥 앉아 계셔도 됩니다."


했더니, 반색을 하며 왕년의 대배우는 되묻는 것이 아닌가.


"아~정말요? 방송에 지장 없겠어요?"


그날의 녹화는 그렇게 진행됐다.


연주회를 주제로 30여분 정도 진행한 대담의 말미에서 나는 예정에 없던 질문을 던졌다.


"아내 윤정희는 어떤 존재입니까?"


특유의 어눌한 말투로 어~음...하던 백건우가 입을 열었다.


"My better half~"


그렇게 말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배우 윤정희는,

'건반의 구도자' 앞에 있는 뮤즈였다.


나는 그날 슈만과 클라라와 함께 있었던 셈이다.


윤정희는 오래 전 한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음악없이는 못살고

제 남편은 영화없이는 못살아요~"


my better half,


딱! 나 보다 더 나은 반쪽이다.


빠리의 지붕 밑에서 살며, 사랑하며, 믿음을 쌓아왔을 두 사람,

평생 기억하고 살 것 같은 여배우의 아름다운 추억들을 알츠하이머가 빼앗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금 우리의 여배우가 빼앗긴 그 기억의 들판에서 마구마구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이어 백건우 측의 입장문이 나왔다.

진실 공방 속 오는 11일 백건우는 국내 연주를 위해 입국할 예정이다.

팩트는 물론이고, 그 뒤에 가려져 있는 진실 또한 조만간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상처는 남을 것이다.


엎질러진 물을 수습한들 목마른 영혼의 갈증이 풀어지겠는가.


통상 알츠하이머는 65세부터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된다고 한다.


3년 시간을 잊고, 그 뒤 3년 공간을 잊고, 그 후 3년 사람을 잊는다고 한다.


그리고 종국적으로 자신을 잊는다고 한다.


2008년 백건우 인터뷰 당시, 그림처럼 앉아 있던 윤정희는 그때 예순넷이었다.


기억의 상실이 진행되기 시작했을 즈음이었을텐데,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생생했다.


배우의 남은 시간이 그의 평생 반쪽과 함께 평안하고 행복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녀의 부고를 접했다. 향년 79세.

R.I.P

망각의 강 건너에서 평화로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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