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가옥에서의 하룻밤

군산야행

by Spero


올 때마다 가라앉는 것 같다

군산 앞바다,

시커먼 물이 돌이킬 수 없도록

금강 하구 쪽에서 오면

꾸역꾸역, 수면에 배를 깔고

수만 마리 죽은 갈매기떼도 온다

사랑도 역사도 흉터투성이다

('군산 앞바다' 중에서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고 했던 안도현의 시를 읽었다.

예상치 못한 군산 행을 앞두고 그의 시집을 다시 꺼냈던 것이다.

섬들이 산처럼 솟아오른 곳, 군산(群山),

"사랑도 역사도 상처투성이"라고 읊은 시인의 감성이 나를 자극했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목, '1930년 시간여행'이라고 쓰인 가로등 팻말이 눈길을 끈다.

悆未廊,

잊을여, 못할미, 사랑채랑.

잊지 못할 사랑방이라...

체크인 전부터 아랫목의 따스함이 전해온다.

게스트하우스 문패 이면에 담긴 건물의 스토리는 그러나 왠지 서늘하다.

왜색이 짙은 이곳은 침략의 역사가 고스란이 스며든 적산가옥(敵産家屋)이다.

적산가옥이라니?

적들의 재산이란 말인데, 이것이 어떻게 적들의 재산인가?

1899년, 군산의 개항과 함께 뉴밀레니엄의 커튼이 열리면서 그들은 밀물처럼 의기양양하게 들어왔을 것이다. 먹고, 잠자고, 종 부리는 지배계급의 신분으로 살았을 조선의 일본인,

그들의 집단 거주지역이 오늘날 시간여행자들의 숙소로 탈바꿈했다.

그러니 어떻게 이곳에서 안락한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 라는 영탄조의 탄식이 나올 법도 했지만, 숙소는 아늑했고 꿈결 역시 사납지 않았다.

범부가 창씨개명했다고 하루아침에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아야 쓰겠는가?

백성을 지켰어야 할 권력의 책임을 묻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군산여행의 백미는 야행이라고 하길래 선뜻 숙소를 나섰다.

길모퉁이로 인력거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상상했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 초원사진관과 이성당을 감아도는 어두운 골목길은 그저 적막했다.

문닫은 점포들 앞에서 서성이다 만난 캐리커처,

시간을 건너온 노부부의 환한 웃음이 어두운 공간을 밝힌다.

세월 속에서 역사는 흉터투성이였을지라도 서로 사랑한 사람들의 기억은 늘 아름답다.

야행을 마치고 돌아온 여미랑,

정원 불빛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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