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끓고 넘치는 남녀상열지사'
토지, 박경리
토지 20권.
지난날의 부채를 갚기 위한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을 때,
과연 나는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었다.
눈이 아려올 때마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오후의 햇살이 오히려 활자를 흐리게 할 때마다 돋보기를 끼었다.
그리고 난, 토지를 끝냈다.
만여 쪽에 이르는 '토지'를 하나의 독후감으로 정리하기엔 내 역량이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작품을 읽는 동안 느낀 단상을 내 일상의 스케치와 함께 하나둘씩 정리하려고 한다.
80학번 국문학도였던 나는 70년대 입학생이었던 복학생 형으로부터 어느 날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박경리 정말 대단해. 사위가 철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손자를 등에 업고 토지를 쓰고 있으니 말이야..."
이상했던 것은 나는 이미 토지를 읽은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작가 나이 마흔셋,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토지는 소설이 아니었다.
80년대에 이미 신화가 돼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문학잡지든, 신문이든, 활자가 아닌 TV드라마를 통해서든 토지의 서사구조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을 것이고
나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인 최서희와 김길상의 신분을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는 이미 다 아는 얘기였다.
토지 속에는 그 보다 애절한 남녀상열지사가 끓고 넘친다.
주인댁 아씨에게 연정을 품었던 하인,
기생이 된 하녀와 사랑에 빠진 양반,
침략국의 남자와 사랑에 빠진 신지식인 여성,
등장인물의 스토리는 그 하나하나가 다 또 다른 완성된 스토리들이다.
임이네로 말미암아 최서희에 대하여 느껴왔던 복잡하고 미묘한 심적 갈등, 그 주술 같은 것에서 풀려나기는 월선이 죽은 후부터였지만 용이는 임이네에 대한 애증을 이제 모두 넘어서 버린 것이다.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상에서 그 미움마저 거두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용이의 삶, 삶의 종말, 생명의 불씨가 꺼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른다. (9권 93~94쪽)
나는 지난날 어떤 기생을 사랑했소이다. 기생이기 이전에는 최참판댁 침모의 딸이었지요. 나는 그 여자에 대한 감정을 동정이라 생각했소. 나중에는 바람기라 생각했소. 더 나중에는 수치로 생각했소. 그는 남몰래 내 딸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으로 도망온 뒤 그 여자는 비참하게 세상을 떴고 내 딸을 지금 최참판댁 부인이 거두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그 아이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소.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핏줄의 정이 필요할 것이오. (12권 346~347쪽)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으로 조선사람도 편견이 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히토미상을 비롯해서, 울분 느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한다는 것은 순수한 것입니다. 내가 일본의 위정 잡니까? 조선총독부의 관립니까? 남의 사랑을 욕되게 하는 그 사람 자신이 불결하기 때문입니다."
벌떡 일어선다. 돌멩이를 주워서 힘껏 강물을 향해 던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나도 오가타 당신만큼 당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둘이 다 이단자예요. 반역자예요. 용서받지 못할 여자예요. 민족반역자, 뿐인가요? 매춘부보다 더러운 여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지요? 그래도 나를 갈보, 왜갈보라 한답니다." (12권 410쪽)
사랑은 신분을, 국경을, 이념을 뛰어넘는다.
하인 출신인 아버지와 양반 출신인 어머니를 부모로 둔 아들의 세대가 새로운 가치관을 만든다.
시대가 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꼭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을 어머님 계급으로 끌어올리려는 생각은 마십시오. 어머님이 내려오셔야지요. 저는 때때로 슬프지만 아버님의 출신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나으리마님, 사랑양반, 그것은 아버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조롱입니다!."
낯빛이 달라지기론 윤국이 먼저였다. 서희의 낯빛도 차츰 파아랗게 질리어갔다. 숙이에 대한 윤국의 감정은 그 뿌리가 바로 부친에게 있었다는 것을 모자는 동시에 비로소 깨닫는다. 서로 대좌한 채 얼어붙어 버린다. 허공과 같은 막연한 공간, 언제 어떻게 해서 이 지경까지 왔는가. (14권 181~182쪽, 모친(서희)이 주막집 처자를 만나느냐고 아들(윤국)에게 묻자 아들이 모친에게 하는 말)
한걸음 더 나아가자.
사랑을 통해 상처받은 영혼들은 새 삶을 얻는다.
"일본인을 사랑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나십시오. 인실 씨는 사람을 사랑한 것뿐입니다." (17권, 154쪽, 하얼빈에서 유인실을 만난 조찬하의 말)
다시 토지의 중심인물 최서희와 김길상으로 돌아오자.
아들 환국에게 애비 길상은 이렇게 말한다.
"아버님은 어머님에 대하여 연민을 느끼셨습니까? 어머님은 대단히 강하신 분인데요."
공격해 오듯 환국은 말했다.
"사고무친한 남의 땅에, 타민족이 오고 가고, 이십이 못된 천애고아의 처녀가 강했으면 얼마나 강했겠느냐." (15권 301쪽)
허나 세상만사가 어찌 사랑뿐이겠는가.
아니, 사랑이 밥 먹여주는가?
밥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만, 밥만큼 중요한 다른 것들은 또 무엇인가?
몰락해 가는 최참판 댁 인간군상들과 개미처럼 무수한 동학혁명의 주역들,
지식인과 일자무식 촌로, 독립투사와 밀정, 그들의 2세와 3세...
구한말 1897년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이 대하드라마는
경남 하동 평사리에서부터 서울, 도쿄, 만주, 상하이에 이르기까지
섬진강물이 남해로 흘러들어 가듯 도도하게 펼쳐진다.
매화에 이어 섬진강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는데, 한번 가봐야겠다.
그 꽃이 벚꽃으로 불리든 사쿠라로 불리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듯 봄날은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