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 박경리 여사를 대면한 것은 1988년이었는데,
신문기자였던 작가 김훈이 그녀를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1975년 이전에도 작가를 이미 만났을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담요로 만든 방한화에 버선을 신고 있었다. 발이 몹시 시려왔던지 이따금씩 방한화를 벗고 손으로 언 발을 주물렀다. 등에 업은 아이는 머리끝까지 온통 포대기로 감싸고 그 포대기 위를 다시 두꺼운 숄로 덮어서 아이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아이가 칭얼거릴 때마다 그 여인네는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얼렀다.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그 여인네는 고개를 뒤로 돌려서 무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말은 나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여인네가 그때 아이에게 한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울지 마라, 아비 곧 나온다.” 아마 이런 말이었을까. 그 여인네가 아기를 업은 포대기는 매우 낡아 있었다. 포대기는 누빈 포대기였는데 허리 부분을 넓게 접어서 아이의 등에 힘이 걸리게 바싹 조였으며 아이의 엉덩이 밑으로 포대기 끈을 여려 겹 둘렀다.
그래도 그 여인네의 야윈 몸으로부터 아이는 자꾸만 흘러내리는 것이어서 여인네는 자꾸만 몸을 추슬러 아이를 끌어올렸다.…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 한 포기보다도 더 무명(無名)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에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려우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독재이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김훈 에세이 '바다의 기별' 중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88~89쪽)
"사위가 철장에 갇혀 있는 동안 손자를 등에 업고 쓴" 바로 그 작품이 '토지'였다.
김훈은 특유의 그 건조한 문체로 1975년 어느 겨울날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맨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콧날이 시큰해졌다.
새벽 두 시께 집으로 돌아와 잠자다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같은 책 94쪽)
그런 여인이 쓴 '토지'에는 헐벗고 춥고 가난한 백성들에게로 향한 작가의 시선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시월도 가고 십일월의 중순, 찬비가 내리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바람에 따라 미루나무의 노란 잎새들이 눈보라처럼 흩어져 날아내리곤 했는데 해가 떨어지면서 한층 바람은 드세어졌다. 초겨울의 짧은 해는 창가에 비치는 새 그림자와도 같이 저녁을 먹었는가 했더니 어느새 사방은 캄캄, 칠흑 같은 어둠에 마을은 휩싸였다. 나뭇가지를 흔들고 길을 쓸어가는 바람소리만 들려왔다. 비는 멎은 듯했다. 집집마다 목마름과도 같은 등잔불이 켜지고 다그쳤던 추수기를 보낸 느긋함이 없지는 않았으나 초저녁부터 자리에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배추뿌리, 고구마 같은 것을 삶아놓고 그것으로 덜 찬 배를 채워가면서 마을 아낙들은 목화씨를 지치지도 않고 발라내는가 하면 눈만 흘겨도 찢어질 것 같은 헌 옷에 무를 대어 깁기도 하고 소반을 들여다 놓고 콩나물 콩을 고르기도 하면서 식구 없는 사람은 홀로 한숨 쉬기, 식구 많은 사람들은 이웃 얘기며 지나온 얘기며, 그날이 그날인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극성스런 아낙은 비 멎는 것을 보고 바람 속에서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콩탁 콩탁!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다. (19권 7~8쪽)
배추뿌리, 고구마로 허기를 채우며 바람 속에서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한도(歲寒圖) 속 누추한 집안 온기마냥 전해진다.
1975년 추운 겨울 영등포교도소 앞 박경리는 100년 전 민초들의 삶을 '토지'로 그렇게 부활시켰다.
구한말의 팬더믹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작가는 삶의 영속성을 긍정했다.
"나를 키운 거는 바람이고 빗물이고 마을 사람이다." (17권 360쪽, 김평산의 작은 아들 김한복)
지난 코로나 3년은 '토지'가 있어 견딜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