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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100년 전의 내로남불

토지, 박경리

by Spero

2023년 봄,

정치권의 힘겨루기가 치킨게임 양상이다. 거부권행사와 탄핵을 실은 폭주기관차가 상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럴 경우, 승자는 없다. 공멸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왜 달리는 걸까?


오래전 나는 몽골의 대초원에서 인상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광활한 부감 씬을 찍기 위해 항공촬영에 동행했을 때였다. 헬기가 기수를 낮추며 스텝지대를 저공 활공하자 풀을 뜯고 있던 가축떼가 화들짝 놀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확인했다. 몸집이 큰 말과 소는 제각각 흩어져 나 살자고 달음질쳤고 약한 양들은 서로 뭉치며 거대한 군집을 이뤄냈다.


몇 년 전 한가위 명절 콘서트 때 나훈아 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옛날 역사책을 보면 제가 살아오는 동안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 나라를 누가 지켰냐 하면 바로 오늘 여러분들이 이 나라를 지켰다”


바로 이 대목!

'토지'를 통해 확인한다.


하동의 청백리 이동진은 망국의 한을 품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떠난다.

최참판댁 주인장인 그의 친구 최치수가 묻는다.


“자네가 마지막 강을 넘으려 하는 것은 누굴 위해서? 백성인가, 군왕인가?”


이동진이 답한다.


“백성이라 하기도 어렵고 군왕이라 하기도 어렵네... 굳이 말하라 한다면 이 산천을 위해서?”


그렇게 간도로 떠난 이동진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지만 가부장적 유교이데올로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한다. 부전자전, 그의 아들 이상현은 우유부단한 알코홀릭으로 전락하고... 최참판 댁 외동딸 서희로부터 실연당하고, 피해의식에 가득 찬 채 서희의 몸종 기화를 범하고,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딸을 부정하고, 독립운동이란 명분으로 도망치고, 결국 알콜에 찌는 고등룸펜으로 전락하고 마는, 허무와 방탕, 비도덕과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타락한 식민지 지식인의 전형을 작가는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루바시카 걸치고 올백한 놈들. 진보파라고도 하고 혁명가라고도 하는데, 조강지처 내쫒고 유식한 계집 끼고서 평등을 외치는 놈, 바쿠닌이 이러고저러고, 크로포트킨이 이러고저러고, 무성한 수엽 속에서 음산하고 심약하게 웃는 무정부주의자라는 것들...(...) 정의, 지금 왜놈의 어린것들이 다음 침략에 대비하여 입이 찢어지게 불러대는 정의의 노래, 가만있자, 뭣이기는 뭣인 모양인데 과연 그게 있었던가? 있긴 있었다. 어떻게 있었는가 하면은 실패한 자는 정의를 환상한 자였느니, 희생된 자는 정의의 사슬로 발목을 묶였던 수많은 백성이었고, 성공한 자는 정의를 칼끝에 꽂고 그것을 무기로 삼는 자였느니라, 하항, 그러면 역사는 무엇이냐, 역사란 정의를 날조한 문서다.' (14권 15~16쪽, 젊은 날 사회주의자였으며 훗날 도솔암 주지가 되는 소지감의 독백)


경험상, 스타일리스트들은 대체로 위선적인 경우가 많다. 남을 위한다면서 내 잇속을 챙긴다.

내 안에도 그런 성향이 있다.

일찌감치 헤르만 헷세가 데미안을 통해 통찰해내지 않았던가.


그 어떤 것도 내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나를 자극하지 않는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비록 발목이 묶였을지라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백성들이다.

달리는 폭주 기관차에 당신들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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