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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일본에는 문화가 없다"

토지, 박경리

by Spero

난 RM이 좋다.

그를 보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오버랩된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나는 여기까지 떠나와 있는데, RM이 여전히 거기에 있는 것 같아, 좋다.

그는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줄리앙 소렐이 되었을 것이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 들러 모네의 작품을 보고 '스탕달 신드롬'을 느꼈다고 말했을 때,

"어, 이 친구....근사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최근 스페인 한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은 이 친구 정말 간단치 않네, 라는 놀라움이었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야, 넌 이제 K라는 수식어가 지겹지도 얺냐?"라는 기자의 건방진 질문에,


"K팝은 프리미엄 라벨이야" 당당하게 응수하면서

"선배(조상 ancestor)들이 싸워 쟁취하려고 노력한 품질보증이나 마찬가지지." 라고

그 공을 자기 너머로 던지는 여유에, 나는 맘속으로 박수를 쳤다.

자존감에 예의가 덧붙으면 싸가지도 겸손이 된다.

비틀즈가 브리티시 인베이전 여세를 몰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을 때,

"야, 니들 어떻게 그 쬐끄만 섬나라에서 여기 미국까지 왔어?"라는

방송 진행자의 질문에

"아, 그린란드에서 좌회전해서 왔지, 머..."라고 응답한 것과 격이 다르지 않은가?


다시 '① 정의를 환상한 자들'에서 언급한 1988년 봄날 캠퍼스 현장으로 돌아가자.


박경리 여사의 강의를 듣는 동안 나는 의문점을 가졌다.

노회한 작가의 일본문화를 비판하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요지는 이러했다.


"일본에는 문화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유명 예술가들이 자살하는 겁니다. 왜냐? 삶과 죽음 같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하는 과정이 예술가의 삶인데, 이런 화두를 지니고 극단까지 갔을 때 그 나라 문화가 찬란하면 거기에 답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본엔 그게 없어요. 있다면 굳이 '칼의 문화'가 존재하지요,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만 펼쳐도 무궁무진한 삶의 길이 펼쳐져 있거든요. 일본엔 그게 없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닫힌 문을 열어제꼈을 때 길 대신 절벽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벼랑 끝은 삶이 아닌 죽음입니다. 벼랑 끝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느냐 아니면 길이 끊어지느냐, 이것이 바로 우리와 일본의 차입니다."


1988년 봄날이었다. 봄날의 캠퍼스는 진달래 개나리가 지천이었다. 캠퍼스 강의실 안은 춘곤증으로 나른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여사의 문화평론에 학생들 대부분은 졸고 있었다. 깨어 있는 일부 학생들이 잡담을 이어가자, "거기, 학생, 조용히 해요!"라고 호통을 치시던 작가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나는 이번 '토지' 20권 완독 여정에서 작가의 그 생각이 토지 속에 그대로 용해돼 있음을 확인했다. 소름이 돋았다.


칼로써 힘을 빼는데 무한한 힘이 소요되는 창조에 바칠 힘이 있겠느냐, 일본의 문화적 빈곤은 바로 거기에 이유가 있고 칼을 삼가며 치지 않고 내 나라를 지키는 데 그친 조선은 당연히 창조에 그 힘을 살렸다, 전 그렇게 보고 싶은 거예요. 비애가 아닌 생명에의 힘, 그 예를 들어보겠어요. 일본의 춤은 손목, 발목의 춤이더군요. 조선의 춤은 전신의 율동이에요. 탈춤의 도약을 보면 그건 터져 나오는 힘이에요. 또 서양의 춤은 발끝으로 땅을 밟고 손등이 하늘을 보는데 조선의 것은 발뒤꿈치로 땅을 치며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고 있어요. 다음엔 노래인데요, 일본 노래의 콧소리, 목구멍 소리에 비하여 역시 조선의 창은 몸 전체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폭포와 맞서서 목을 트는 수련과정이 그것을 증명하지요. 악기 얘길 할까요? 조선의 가야금은 비애 아닌 통곡과 환희, 한마디로 그것은 한(恨)이에요. 일본의 고토를 들었을 때 전 소리로 들렸을 뿐 움직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많겠지만 양쪽의 모든 것은 그와 같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정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14권 381쪽, 유인실이 오가타에게 하는 말)


BTS의 등장이 생뚱맞은 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난, 35년 전 그날 그 강의실에서 선생의 강의를 듣는 동안 타자의 문화를 정의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일본에 왜 문화가 없겠는가?

그 문화의 저급성과 공격성은 어차피 상대적 견해에 말미암은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사상이 없다고까지 한 언급 역시 그러하다.


"사람을 포함하여 동물에게 가장 더럽고 추악해 보이는 것이 내장이에요. 배를 갈라서 내장을 드러내 죽는 방법은 그래서 가장 추악한 거 아니겠어요? 그것을 의식화(儀式化)하고 미화하는 이유가 뭐죠? 그야말로 야만적이며 그로테스크한 것을 아름답고 숭고학, 따라서 사람에 틀림이 없는 천황이 현인신(現人神)도 될 수가 있었던 거에요. 가치전도, 전도된 진실에 순치되어온 일본인은 비극이라는 감각도 없는 채 비극 속에 있는 겁니다. 그것은 다 약탈의 도구며 장치에요. 보다 높은 곳을 향하는 이상이나 고매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와 같은 도구 장치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거지요. 당신네 나라에 사상이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문화가 빈곤한 것도 말예요. 민족주의도 없구요. 애국이라는 말을 빌린 공범의식, 당신들의 애국심은 공범의식이지요. 유일하게 아름다운 죽음이 있었다면 도회령(蹈繪令)에 의해 순교한 나가사키[長崎]의 천주교도, 그들의 죽음뿐일 거예요." (14권 382~383쪽, 유인실의 오가타에게 하는 말)


그들만의 리그,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국주의, 전체주의를 비판한 작가는 일본 사회 지식인들의 극단적 선택을 이렇게 해석한다.


"당신 나라 문인들의 잦은 자살을 나는 이렇게 봅니다. 대개의 경우 개인적인 것보다 사상적인 막다른 골목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목숨을 끊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면역이 안 되었다고나 할까, 저항력이 없다고나 할까요? 의문에 대하여 거의 투신하듯 한 광신자, 시니시즘의 무신론자들, 두 가닥의 올로 꼬아온 다른 곳에 비하여, 무풍지대에서 납득하고 공모하고 안주해온 일본인들, 안주한 곳의 문을 열고 나가기도 어렵지만 일단 나가보면 엄청난 황야란 말입니다. 나가떨어지지요." (14권 426쪽, 일본 여자와 결혼한 조찬하가 조선여자를 사랑하는 일본남자 오가타에게 하는 말)


그렇다면 문을 열면, 우리 앞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는가?

문화 찬란한 미래가 보이는가?


"일본에는 문화가 없다", 라고 단언한 고인이 된 작가의 성찰을 토지 완독 과정에서 확인하며 이런 생각을 해본다.


100년 전과 그로부터 100년 후의 대한민국은 지금 얼마나 달라져있는가,

지금부터 100년 후는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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