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토지, 박경리

by Spero


5년 전 장인어르신께서 소천하신 이후 장모님께선 홀로 사신다.

아흔이 넘으신 연세에 요즘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신다.

보청기를 해드렸는데 잘 끼지 않으신다.

자동차, 오토바이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다는 게 이유인데

아내 생각은 다르다.

비싼 보청기를 잃어버리실까 두려워 그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보훈병원에 가 고음을 낮추는 데시벨 조정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거듭 설명을 드렸다.


"어머니, 난청을 방치하면 더 큰 문제가 있어요. 청력손상을 방치하면 치매발생률이 높아진다고 하잖아요. 보청기 꼭 하셔요."


장모님은 보청기를 끼겠다는 말씀 대신,

바쁜 데 병원까지 데려다줘서 고맙단 말씀만 연거푸 하신다.


박경리의 사위 김지하가 영등포교도소를 나온 때가 1975년이니까, 그때 여사의 나이 쉰이었다.

이후 33년 더 사시다 타계하신 건데, 비슷한 또래이신 장모님은 지금 그 보다 훨씬 더 오래 살고 계시다.


외동딸 시집보내고, 사위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도망 다니고, 수감되고, 출소하고, 또 수감되고...

손자를 등에 업고 원주시 단구동 텃밭을 갈며 '토지'를 썼을 작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월은 험했을지라도 작가의 시선은 선했다.

보라, 수정보다 더 명징한 이 문장들을...


어느덧 목탄버스는 통영 시가를 멀리하고 언덕을 힘겹게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이미 바다가 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상의는 오른편 차창 밖을 내려다본다. 언덕 저 아래쪽에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눈부시게 푸른 바다는 마치 잠긴 호수 같았다. 기다랗게 돌출한 육지가 바다를 휘들러 싸고 좁아진 물길을 향해 돛단배 한 척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또 바다가 있었으며 섬이 떠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늘진 듯한 뒷바다, 정밀하고 신비하며 무심했다. 목탄버스는 한 마리 개미와 같이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보면은 무심한 바다, 무심하고 무심한 바다, 영양실조로 보기 흉하게 머리털이 다 빠져버린 아낙들, 그 흔하던 걸인들 조차 동냥할 곳이 없어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부둣가에서는 빈번하게 응소자(應召者)를 위한 만세 소리, 일장기가 물결쳤으며, 아아 그런 세세한 것이야 말해 무엇 하나. 바다에서는 전함이 침몰하고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불을 뿜고 대륙에서는 초연 자욱한 속에 끝없이 끝없이 사람들이 쓰러져가는데 저 바다는 어쩌면 저토록 아름답고 정밀하며 무심한가. (19권 374쪽)


메마른 시대의 우물에서 한 두레박 희망을 건져내는 작가가 나는 자랑스럽다.

위대한 작가 역시 나이 들어가며 눈 침침하고 귀 먹먹하셨을 텐데

'한 마리 검은 숫말' 같았던 민주 투사 사위야 장모님 챙길 여력 없었겠지만

통영 앞바다 일개 조약돌 같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토지'를 이제서야 완독 한 것이 그저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35년 전 원주의 대학 캠퍼스 강의실에서 들려오던 그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쟁쟁하니 메아리친다.

내 나이 들어 난청에 시달린들 보청기 없이도 그 소리 올곧게 들려오지 않을까 싶다.

올해도 하동 평사리 들녘엔 빼앗긴 들에 봄 오듯 매화,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겨울 햇볕과도 같이, 쏟아지는 폭설과도 같이, 쩡! 하고 굉음을 지르며 스스로 몸을 가르는 빙하와도 같이, 그리고 동천에 얼어붙은 달과도 같이, 물론 봄의 환희와 여름의 정열도 있지만, 어디 사람의 삶만이 그러했겠는가. 삼라만상, 억조창생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그 모두가 시간[終] 자리[橫], 혹은 공간이라는 엄연한 십자가 밑에서 만나고 이별하며 환희와 비애를 밟고 지나가는 것이다. 욕망의 완성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생명의 불행인 동시에 축복이다. 종말이 없는 염원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20권 241쪽)


삶을 응시하는 위대한 작가의 젖은 눈동자에 경배를!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고, 보름 만에 퇴원한 그날부터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토지'의 원고를 썼던 것이다. 백 장을 쓰고 나서 악착스런 내 자신에 나는 무서움을 느꼈다. 어찌하여 빙벽(氷壁)에 걸린 자일처럼 내 삶은 이토록 팽팽해야만 하는가. ('토지'1권 서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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