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신체적으로 평범했다. 키가 작고 레슬링 선수처럼 몸매가 단단했으며 모래색 머리카락은 가늘고 코는 오똑하고 하늘색 눈으로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로 상대편과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의 스스럼없는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짐짓 무관심한 듯한 그의 목소리는 부하와 탄원자들에게 둘러싸여 권력을 휘두르는 데 익숙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595쪽)
푸틴을 처음 만난 오바마는 단박에 그가 독재자가 될 것이라 직감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일전에 프랑스 대통령 마크롱은 푸틴에게 모욕감을 주어선 안된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모욕당했다.
그것도 수족 같았던 부하에게 말이다.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주인에게 개긴 하인의 무장반란을 정의로 포장하고 있다.
"우리는 불의로 인해 행진을 시작했다"
Justice in strength!
힘이 곧 정의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니 푸틴은 이제 끝난 거 같다.
사실 푸틴을 보면 한때 시카고 정치 조직이나 태머니홀을 운영한 자들이 떠올랐다. 거칠고 약싹 빠르고 무정하며 자신이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알고 자신이 경험한 좁은 영역을 결코 벗어나지 않고 낙하산, 뇌물, 금품 수수, 사기, 이따금 저지르는 폭력 등을 정당한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 말이다. 그들의 삶은 제로섬 게임이었다. 자기 부족 이외의 사람들과 거래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들을 신뢰하지는 못했다. 자신을 보살피는 것이 최우선이었고 그다음은 자신에게 딸린 것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런 세상에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권력을 쌓은 것을 넘어선 고결한 열망을 조롱하는 것이 흠이 아니라는 미덕이었다. (599쪽)
아이러니다.
고르바초프로부터 시작한 개혁 개방,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물결이 자국 연방을 해체하고 이웃 베를린 장벽까지 무너뜨렸지만 그 보다 더 견고한 독재시스템이 완성되었으니...
러시아는 푸틴의 독재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오바마는 이미 십수 년 전에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푸틴이 권력을 누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새 러시아는 점차 옛 러시아를 닮아갔다. (...) 러시아의 주요 언론 매체는 푸틴의 친구들에게 장악되었으며, 나머지는 국영 매체가 공산당 지도자들을 칭송했듯 푸틴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보도해야 했다. 독립 언론인과 시민지도자들은 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의 감시를 받았으며 때로는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게다가 푸틴의 권력은 단순히 강압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인기가 있는 지도자였다. (러시아 내에서 그의 지지율은 60퍼센트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었다). 그 인기의 뿌리는 철 지난 민족주의자이자 어머니 러시아의 옛 영광을 되찾고 지난 20년간 수많은 러시아인이 겪은 좌절감과 모욕감을 씻어주겠다는 약속이었다. (588쪽)
그리고 오바마는 이 한마디로 러시아의 미래를 점쳤다.
약싹 빠르고 무자비한 자에게는 혼동이 곧 축복이었다. (589쪽)
위기에 처한 어느 곳에서든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사람들이 있다.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오바마의 심경은 착잡하다.
힘겹고 때로는 위험한 일을 하는 좋은 사람들의 기분을 잠시나마 북돋울 수 있어서 기뻤다. 나는 이런 노력이 러시아에서도 결국은 결실을 맺을 거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푸틴의 일 처리 방식이 내가 받아들일 정도 이상의 세력과 추진력을 가졌으며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희망에 찬 이 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조만간 자신의 정보에 의해 소외되거나 탄압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600쪽)
루스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라고 했지만,
두려움 한복판으로 뚫고 들어가는 용기가 어디 말처럼 쉬운가.
무모함과 비겁함 사이에서 중용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가치의 실천은
기원전이나 기원후나 난제일 수밖에 없다.
'정의로운 공동체'와 '행복한 개인'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2009년 고르비를 만난 오바마는 이렇게 회고한다.
78세이지만 여전히 정정하며 특유의 붉은 모반이 이마에 퍼져 있던 그는 내 눈에 기이하리만치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한 때 세계 최고의 권력자 중 하나였던 여기 이 사람의 개혁 본능과 비핵화 노력은 -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 거대한 변화로 이어졌고 그에게 노벨 평화상을 안겨 주었다. 하지만 이젠 자기 나라에서도 대체로 찬밥 신세였다. 그가 서구에 굴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그를 오래전에 시효가 끝난 공산주의 퇴물로 여기는 사람 모두 그를 경멸했다. 고르바쵸프는 리셋과 나의 세계 비핵화 제안을 열렬히 환영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축사를 하기 위해 15분 만에 면담을 끝내야 했다. 그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순간 우리 둘은 공적인 삶이 얼마나 덧없고 무상한 지를 생각했다. (598쪽)
정말 무상하다.
고르비 또한 이제 저세상 사람이 되었으니...
중앙아시아를 둘러보고 돌아온 전직 외교관의 전언이 이명처럼 며칠째 계속 웅웅거린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난 친러 외교당국자에게 밥 딜런 식으로 물었다고 했다.
-도대체 사람이 알마나 더 많이 죽어야 이 전쟁이 끝날까요?
돌아온 답이 의외였다고 했다.
=얼마는 또 뭐가 얼마에요. 한 놈만 죽으면 되지...
적은 멀리에 있지 않다.
멀리 있는 자는 나를 찌르지 못한다.
돈 콜레오네(말론 브란도)는 아들(알 파치노)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친구는 가깝게, 적은 더 가깝게...
푸틴은 프리고진을 가깝게 두었지만,
그 친구는 가까이하기엔 너무도 먼 당신이 되어 버렸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마하트마 간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