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은 환자가 돌리듯 천천히 돌려야 해"
올해 아흔 하나이신 어머님은 사위인 내게 30년 넘도록 늘 한결같은 주문이시다.
올핸 녹두 양이 늘었다. 500g 한 봉지를 추가하셨다.
밤새 불린 녹두를 가는 것은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다. 후다닥 끝내려는 내게 어머님은 또 말씀하신다.
환자가 돌리듯... 천천히...
어머님께서 아내를 낳으신 이듬해 300원을 주고 사셨다는 현무암 맷돌은 돌하르방 얼굴 모양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 폭발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집안 보물 1호다.
두 세대를 거치는 세월 동안 갈린 녹두의 양은 얼마나 될까?
믹서기를 이용하자는 아내와 처제의 툴툴거림에도,
언제까지 이런 원시적 노동을 해야 하느냔 형님의 논리적 항변에도,
어머님은 굽힘이 없으셨다.
믹서기는 가는 것이고, 맷돌은 으깨는 것이니,
둘의 차이에서 오는 식감은 견줄 수 없는 바,
모름지기 녹두 빈대떡은 맷돌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맛을 낼 수 없다는
구순 노인의 한결같은 고집이셨다.
젊은애들은 연휴 근무다, 취업 준비다, 혹은 시험 공부다 등등의 이유로
이른 아침 얼굴을 보이지 않았고,
맷돌을 가는 것은 결국 내 몫이었다.
환자까진 아니지만,
환갑 넘긴 내가 맷돌을 돌린들 얼마나 힘을 쓰겠냐만,
어머님은 이번 명절에도 수없이 되뇌셨다.
"환자가 돌리듯, 천천히.. 천천히..."
벤자민 버튼처럼,
시계반대방향으로 맷돌을 돌리고 돌리니
어느새 그 많던 녹두가 다 갈렸다.
아니, 으깨어졌다.
이제 쉬자.
부치는 건 아내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