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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의뒷면 Aug 30. 2021

엄마를 찾습니다

결핍

사내 경조사 게시판에 직장 동료의 모친상 알림이 떴다. 마 전 어머님을 요양원에 모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엄마와 남남처럼 지내다 제대로 된 사과도 받지 못한 채 이별하면 어쩌나 덜컥 겁이 났다. 억울함이 솟아올라 생각이 더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퇴근하고 오니 문 앞에 반찬통이 놓여있다. 앙다문 입술이 떨린다. 엄마만 보면 성난 어린아이가 된다. 반갑지가 않다. '좋아하지도 않는 반찬인데 이번에도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가져다 놓았네. 주는 데로 먹으라는 건가? 원한 것도 아닌 데 고작 이런 거 해주면서 고생했네 어쩌네 하고 생색낼게 뻔한데. 거절하면 화내고 받으면 생색내고 이건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아직도 무엇이던 주는 대로 고분 고분하게 받아들이는 착한 아이가 되기를 강요한다. 일방적으로 반복되는 행동에 마음이 금세 분노로 차올랐다. 엄마만 보면 마음이 통제되지 않고 변덕스럽게 들린다. 오래 쌓인 분노와 억울함이 금세 떠오른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아이와 종일 밀착된 하루를 보냈다. 엄마가 가까이 있었지만 혼자 있을 때가 많았다.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가사도우미의 점심을 챙기는 엄마였지만 나에게는 무심했다. 엄마의 도움으로 편하게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쉬지 못했다. 서운하다고 말하면 내치기만 하는 엄마에게 더는 마음을 표현하고 기대지 못했다. 엄마는 끊임없이 목욕가방을 들고나갔다. 할머니가 낙상으로 입원했을 때도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딸이 산후조리로 친정에 머물 때도 다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처럼 외출했다. 한번 나가면 해가 질 때쯤 들어와 저녁을 준비했다. 엄마는 만 나면 누워있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느꼈을 뿐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보지 못했다. 이제와 보니 엄마는 우울했다. 요즘은 살림하는 아주머니를 들이고 목욕탕을 오가며 잠을 잔다. 외손주 돌봄은 소용없는 일이라며 거절한다. 아이들 손에 만 원짜리 몇 장을 쥐어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친청에 가도 엄마가 지은 밥 대신 외식을 한다. 그마저도 사양할 처지가 아니다. 


남동생이 태어난 후 어린 나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엄마보다 할머니가 익숙하다. 엄마 품을 빼앗기고 버려졌다는 느낌이 내면에 깊숙하게 깔려있다. 그 마음의 정체를 알지 못해서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하며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당연한 요구를 까다롭다고 평가했고 불만을 말하면 고작 그런 일로 삐졌다며 감정을 축소했다. 엄마와 같이 있으면 불편했다들 때 도움을 청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 엄마, 보살핌과 돌봄을 기대할수록 멀어지는 엄마, 자기 마음이 먼저인 엄마,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관계 안에서 무력해져 갔다. 가까운 관계에서 자연스레 생겨나는 욕구를 기를 쓰고 틀어막으려다 보니 금세 지쳤다. 상처가 반복되어 마음을 닫아걸었다. 엄마와의 만남을 피하며 물리적으로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 결점을 찾지 못한 채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막이었다. 연락 없이 불쑥 찾아와 반찬을 펼쳐놓고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쏟아놓고 가버렸다.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끊을 수 없는 사이라서 아이들의 눈을 피하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나를 괴롭히는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설사 그것이 부모자식 사이라 하더라도 나를 할퀴는 방식을 멈추려 했다. 내 감정에 충실하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다른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내 선택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래서 핏줄은 복잡하고 구질구질하다. 부고 알림 하나에 며칠을 복잡한 상념에 질척거렸다.


친정엄마와 2박 3일이라는 연극이 있었다. 가로등에 매달려 펄럭이는 광고가 낯설었다. 내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늘 멀찍이에서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와 밀착되어 지내는 일상에 거부감이 들었다. 2박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엄마와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 앞에서 무너지고 흐트러질 나를 드러낼 용기가 없다. 어리광을 부리는 나를 수용하고 품어줄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으며 수다를 떠는 소녀를 보면 부러웠다. 소녀의 들뜨고 행복한 표정을 훔치고 싶었다. 나도 그런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다. 따뜻하고 살가운 엄마였다면 힘든 하루를 종알거리며 말할 수 있는 엄마였다면 지금처럼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에 시달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서 서툰 것이라고 이해하려도 해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감고 넘어가 보려도 했다. 덮어둔다고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변해갔다. 보살핌을 원하는 욕구는 엄마의 냉담함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변명하거나 사과하지도 않았다. 형식적인 대답으로 성급하게 상황을 희석시키고 모면하려고만 했다. 안전한 애착을 원할수록 지쳐갔다. 부모자식이라는 위계적인 관계에 억눌려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책감에 휩싸여 감정을 의심하 괴로워했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에 압도되어 자책하기만 했다. 막히고 억압된 감정을 확신하지 못해서 답답했다. 내 감정을 진솔하게 보지 못하게 하는 엄마가 버거워서 악을 쓰고 밀어냈다.


막내의 장난감을 고르려 매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아빠가 딱 하나만 사줄 테니까 하나만 골라. 알았지?" "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 중년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반복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몸이 움직였다. 카트에 어린 남자아이를 태우고 매장을 돌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제법 체구가 크고 우락부락다. 아이들아빠의 눈치를 보느라 장난감을 고르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하나만 고르라는 말에 잔뜩 긴장하는 아이들 표정이 가깝게 다가왔다. '하나만 골라야 하는데 무엇을 고르지? 이것도 가지고 싶고 저것도 가지고 싶은데 어떡하지. 두 개를 고르면 아빠가 분명 화를 낼 텐데. 그건 싫은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몰라. 갑자기 아빠 맘이 바뀌면 그냥 집으로 가야 할지도 몰라. 어떡하지 어떡하지. 시간이 없는데.' 아이들의 초조한 감정에 몰입되었다. 아이들 눈에서 작고 어린 나를 보았다.


단골 삼겹살 집에 들렀다. 바삐 고기를 굽고 있는데 건너편 가족이 눈에 들어왔다. 고기를 굽는 젊은 부부와 만화 영상을 보는 대여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형제가 있었다. 어린 자녀를 가진 가족의 일상적인 저녁 식사였다. 아이들을 먹이며 식사하던 중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얌전하게 말 잘 듣고 있으면 아빠가 맛있는 초콜릿 줄게. 그 초콜릿 알지?' '얌전히 있어야 해?' 작고 어린 내가 소리쳤다. '말을 잘 들으라는 게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말해요.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거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싫은 거잖아요. 왜 그러는 건지 알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귀찮은 거잖아요. 나도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하고 싶은 게 있다고요. 아빠는 꾸짖지만 다 이유가 있어요. 그 따위 초콜릿 필요 없어요. 초콜릿 먹는 데 자격이 있어야 해요? 그냥 먹을 거예요 '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여서인지 아직도 내 안에 어린아이가 있어서인지 모르겠다. 장을 보다가 길을 걷다 강요하는 어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혼자서 분통을 터트리는 아이를 발견한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상황에 감정이 동화되어 해소되지 못한 억울 분노를 끄집어낸다.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그렇게 하면 엄마 병들어 죽을지도 몰라. 집에 가버린다.' 기억 속 오래된 말들이 떠오른다. 친정엄마가 위를 이용하여 심어놓았던 공포, 두려움으로 나를 길들였던 말들이다. 천방지축인 어린아이에게 서툴었던 그녀가 선택한 손쉬운 방식이었다. 육아가 처음이라 서툴렀던 엄마의 방식을 탓할 수는 없다. 나도 매일 아이들 앞에서 당황하고 서툰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린 내가 그 말에 느낀 공포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잘못된 행동으로 아이가 상처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나도 내 감정을 앞세우면서 아이들의 죄책감을 건드리기도 한다. 급히 상황을 모면하고 원하는 결말을 얻고 싶은 얄팍한 속셈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아이들의 연민과 동정을 자극하는 연극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아이들도 엄마의 서툰 마음을 느낄 것이다. 쉽고 익숙한 것과 어렵고 어색하고 것 사이의 좁은 길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결심보다 관성이 앞서고 의지보다 습관이 힘이 세다. 육아 관련 책과 동영상을 주기적으로 보면서 애써보지만 무의식에게 뒤처지기 일쑤다.


엄마가 되고서 알았다. 엄마를 온전히 느끼지 못했다. 엄마가 안전지대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를 의심하고 경계한다. 아이의 눈 속에 비치는 내가 뚜렷한지 아이의 손끝에 닿는 온기가 적당한지 검열한다. 엄마라는 것이 어떤 태도와 온도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책으로 모성을 익혔다. 육아서에 집착하면서 엄마의 모습을 완성해 보려 애썼다. 아이들을 키우며 매일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진땀을 빼면서도 타협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여전히 엄마 앞에서 성난 어린 날의 나를 물리치지 못해서였다. 매일 살을 맞대는 아이들 앞에서도 스스로를 검열하다 보니 육아가 힘에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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