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딸의 쓸모
feat.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다.
어릴 적 내 행동의 모든 원천은 인정받고 싶어서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동생에게 양보하고 아빠 뜻에 따라 전공을 선택하고 공직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 것도 전부 그에게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했다. 잘했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손으로 꼽을 수나 있을까? 이제야 돌이켜보면 나에게는 완고하게도 인색했다. 그런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마음 조리고 조바심 냈으니 나도 내내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사랑이었다면 사랑스러운 그의 아이가 되고자 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삼 형제의 장남인 아버지의 첫아이, 큰딸인 나는 그에게 처음을 선물한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쉬이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너그럽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평가와 인정의 기준 자체가 높았다. 장녀라서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그에 비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는 적었고 할 수 있는 것을 누릴 선택지도 좁았다. 조금 성장한 후에는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치만 높아져 갔다. 첫째인 나는 알아서 공부하고 알아서 취직하고 알아서 결혼하고 독립하기를 요구했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것이라며 물러서듯 말하면서도 온전히 내맡기지는 않았다. 큰 딸에게는 어떤 경로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굴었고 그 길로의 접근을 유도했다. 하지만 간혹 어떤 지점에서는 앓는 소리를 하며 동정심을 자극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어머니의 돌봄과 살림살이에 해당하는 가사노동이 큰딸의 일처럼 여겨지는 일이 빈번했다. 그렇게 침범하고도 당연한 듯했다. 큰딸에게는 그렇게 해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서울권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었고 수도권에서 일을 하면서 도시의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의 욕망은 아버지가 딸에게 허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욕심이었다. 성장하면서 늘어나는 욕구는 막막한 아버지의 고집 앞에 충돌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내 삶의 범위는 아버지의 손바닥 안으로 좁아져갔고 반대를 경험하고 학습하며 작아져 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여기 까지는구나,,, '하는 체념에 이어진 포기였다. 큰딸은 집안에서는 쓸모가 있지만 집 밖을 나서는 일에는 쓸모를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위험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완고함은 당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사실 아버지가 선택한 그 직업도 집안에서 쓸모가 가능하기에 용인된 것이었다. 아버지의 권력을 떠받치고 있던 어머니는 그와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그의 완고함은 큰 딸인 나에게만 해당했다. 남동생은 남자라는 이유로 또는 그 외의 어떤 이유로도 수도권 대학에 가는 것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나는 것도 지방에서 홀로 살며 일하는 것도 포기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고 당당히 통보했다. 오히려 그런 동생의 행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도 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남겨진 자질구레한 일들은 모두 내 몫이었다. 사무실에서도 막내로 있었던 때라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지만 틈을 내어 동사무소와 은행 등 여러 관청을 오고 갔다. 그때는 그게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일이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를 보내지 못한 마음과 인정에의 욕구가 복잡하게 뒤얽힌 행동이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장녀에게 부여된 기대치를 쫓으려 애썼다. 그것에 익숙해져 있어 내 행동의 모든 동기가 되었다. 결혼을 준비할 때도 어머니가 수고롭지 않게 하려 했다. 혼자서 또는 예비남편과 함께 새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물론 그에 필요한 모든 비용도 내게서 나왔다. 그러면서도 돈의 씀씀이가 헤프지는 않은지 치대곤 하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삼켜내었다.
아버지가 떠난 지 10년이 되지 않은 즈음부터 할머니는 계속 아팠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프고 싶어 했다. 아들을 먼저 보낸 죄인이라는 주홍글자를 가슴에 새기다 생긴 병이었다. 이곳이 아프다 해서 병원에 가면 의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진통제만 주었다. 저곳이 아프다 해서 병원에 가서 비싼 기계로 사진을 찍으면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할머니의 하루는 병원을 다니는 일로 채워졌고 약통은 메모 없이는 구분하기 어렵게 가득 찼다. 내과에서부터 산부인과까지 할머니의 진료 예약에서부터 처방까지 전부 손녀사위인 나의 남편이 관리했다. 낙상으로 엉덩이뼈를 통째로 바꿔 넣는 수술을 한 이후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분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사별 후에 큰딸에게 맡긴 시어머니의 보살핌이었다. 어린 두 아이들 때문에 종종거리는 나를 대신해 남편이 분담하고 있었다.
애착을 형성하는 생애 초기에 나를 보살펴준 할머니는 사실 내게 엄마와 같다. 할머니와 엄마가 등호로 성립될 수 없는 관계라 해도 내게는 그러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도 나도 보이지 않은 끈이 이어진 것처럼 서로에게 닿아있다. 엄마에게 시어머니인 나의 할머니는 내게는 사랑하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마음을 꺼내고 나면 이상하게 엄마를 배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부른 엠블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며칠 후 눈을 감으셨다. 큰 딸은 그렇게 남편이라는 대리자를 통해서 마지막까지 쓸모를 다했다. 할머니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자를 함께 부여잡고 가슴 치던 날들은 큰 딸이자 손녀인 내게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