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흔적
feat. 그들을 만나기 불편한 이유
청명한 하늘빛을 따라 산책길에 나섰다. 아직 물기를 잔뜩 머금은 땅과 나뭇잎은 촉촉했다. 중력의 무게만큼
움푹 파여가는 대지 위에 발걸음이 선명하게 찍혔다. 지난밤에 세차게 불던 바람과 쏟아지던 비 줄기는 이제 사라졌지만 숲 속에는 그들이 지나간 일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나뭇가지는 꺾이고 부서졌고 물길이 지나간 자욱이 남은 대지는 철벅이고 있었다. 떨어져 나뒹구는 나뭇잎과 부러져버린 굵직한 나무줄기는 이리저리 흩어져 지나가는 길목을 가로막았다. 나무와 숲은 지난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의 시간은 정지된 것처럼 고스란히 흔적을 남겼다.
기억은 시간을 거스른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일을 잊으려 한다고 잊히지 않는다. 의지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제갈길을 내달린다. 나아가다가 뒤돌아가고 정지되어 멈춰 서기도 한다.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과거를 살게 한다. 아버지가 선택한 죽음은 내게 시간을 넘어선 기억이다. 그것은 항상 과거가 아니라 생생한 현재다. 그가 너무 불쌍하고 가엾어서 죽고 싶기도 했고 죽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막막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조금 더 나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통째로 빼앗겨버린 것 같은 암울함에 잠겼다. 서글픈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눈물이 흐르지 않는 메마른 슬픔에 익숙해졌다.
그의 가련한 운명을 안타까워했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진정한 해방 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을 부정하고 지워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고 내내 그리워하면서 내색하지 못했던 분이었다. 할머니를 보내고 우리는 끝내 숨길 수 없는 상처를 감추려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걷어치웠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무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꺼내어 말하지 않는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처럼 서로를 모른 채 한다. 가족의 얼굴에 비치는 아비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마주치지 않는다. 그에게 관련된 그 무엇에도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이 사악하게만 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고 타협해버렸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 한편에 자리한 어떤 불편함을 감정적으로 호소했다. 그의 이름을 말했고 그것은 회복할 수 없는 실수가 되었다.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은 나는 그들과 멀어졌다. 실수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실수라고 했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숨기려고만 하는 그들과 말하고 싶어 하는 나는 다르지 않다. 그들의 위선을 비난하면서도 나는 아직도 아비의 죽음을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들과 나는 동전의 양면처럼 맞닿아 있지만 반대편을 향해 돌아서 있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벗어나 온전히 마음껏 자주 그를 그리워한다. 그가 새벽마다 뛰어다닌 강가를 찾아 거닐고 그가 아끼던 식물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그가 마음을 쓰며 정성으로 일을 대했듯이 눈앞에 닥친 일에 조금씩 성의를 기울여 보려 한다. 추석 아침, 사제의 기도문을 들으며 창백하게 아름답던 아비의 얼굴을 생각했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에 그가 있을 것이라고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쓸쓸하고 처연한 그의 뒷모습에 평화를 빌어주어야 할 것만 같은 죄책감에 붙들려 있다. 아직 맛본 적 없는 평화지만 그것이라면 그를 위로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자전거 페달을 세차게 밟아 나아가는 큰 아이의 뒷모습이 먼발치에서도 한눈에 잡힌다. 아직 두 발 자전거로 독립하지 못한 작은 아이는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네발 자전거의 중심을 잡으려 애쓴다. 페달을 번갈아 밟는 나와 남편 사이에 앉아 종알거리며 주변을 관찰하는 막내의 목소리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쨍하게 가로지른다. 여유롭게 웃는 큰 아이와 땀을 뻘뻘 흘리는 작은 아이 아빠의 팔을 꼭 잡은 막내 아이 사이로 맑고 상쾌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제 오고 가는 인적 없는 조촐한 명절에 헛헛해진 마음이 밝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이내 충만함으로 변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날들이려니 하곤 이미 내게로 온 다정한 것들을 헤아리며 심란해지려는 마음을 다 잡았다.
출처:pinterest 이우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