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슴츠레 눈을 떠 시계를 보니 7시가 넘었다. 햇살한 줌 없이 어둠에 싸인 겨울 아침이다.새근거리는 식구들의숨소리로 채워진 시간, 잠이 덜 깬 눈으로 거실로 나가 불을 켠다. 느닷없는 밝음에 놀란 눈을 찡그린다.
요가 매트를 펴고 자리에 앉아 호흡을 내쉰다. 랜선 요가 선생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밤새 굳어진 몸을 풀어본다. 이제 포근한 이불에 싸인 아이들에게 아침을 알려야 할 순간이다. 주저하다 불을 켜고 텔레비전의 볼륨을 높인다. 꼼지락거리는 아이들의 인기척을 느끼며 우유와 과일을 꺼내고 냄비를 올린다.
부스스한 머리에 반쯤 감은 눈으로 식탁에 앉는 아이들의 표정은 아직 꿈결을 걷는 듯 나른하기만 하다. 깊고 긴 겨울밤을 지나 찾아온 아침이 반갑지 않다. 시간이 조금만 더 길고 느리게 흐르면 좋겠다. 두툼한 잠바와 목도리를 걸치고 현관을 나서는 남매를 가볍게 안으며 인사를 한다. 오늘도 너의 하루가 편안했으면 좋겠다고 속삭이며, 어린이집 등원을 함께 할 로봇을 고른 막내가 신발을 건네며 발을 내민다. 엄마만 보면 아기가 되는 막내의 어리광이 귀찮지만 밉지 않다. 한 손에는 로봇을 쥐고 한 손에는 엄마 손을 잡고 걸음을 딛는다.
차갑지만 싱그러운 바람이 얼굴에 따갑게 닿는다. 몸은 움츠러들지만 호흡은 청량해진다. 서늘하지만 청량한 겨울아침이다. 무겁게 찌푸린 하늘을 올려보며 아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묻는다. "엄마, 이제 곧 눈 올 거야?" "글쎄,,, 하늘을 보니까 곧 눈이 올 것도 같네. 기다려보자" 막내는 약속이라도 받아낸 듯 뿌듯한 표정이다. 아이의 얼굴이 말간 눈처럼 빛난다.
회의가 끝나면 회의가 있고 보고서 제출을 마치면 보고서 제출이 있다. 끝날 때까지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일에는 마침표가 없다.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면서 종족을 늘려갈 뿐이다. 그 따위 녀석들을 뒤쫓다 하루와 한 달이 일 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스쳐 지나간다. 모르는 척하며 넘겨도 되고 안 그런 척하면서 지나가면 되는 일을 그러하지 못하고 붙들고 고민한다. 성실도 지나치면 과욕이 된다. 스스로를 옭아매는 굴레가 된다.
먹는 것보다 혼자만의 시간이 조급한 내향인은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숲으로 향한다. 외톨이라는 성급한 오해를 피하려 모자도 준비했다. 이제 혼자가 될 시간이다. 오랜만에 들어선 숲은 겨울빛으로 물들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청설모도 보이지 않고 들고 나는 숨소리만이 귓가를 채운다. 메마르고 황량해진 숲이지만 길게 뻗은 가지와 깊숙이 박힌 뿌리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위안을 준다. 걷다 보면 뒤죽박죽이던 것도 제자리를 찾고 엉망진창이던 머리 속도 선명해진다.
오후 4시, 지루함이 찾아오는 시간, 모니터만 보다 지친 눈이 몽롱해진다. 슬그머니 시시한 말이라 해볼까 망설인다.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무 말에 시간을 태워 보낸다. 시침과 분침이 퇴근시간을 향해 한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에 청소만이 남아있는 퇴근 시간이지만 서둘러 사무실을 벗어날 생각뿐이다. 소란한 만남과 떠들썩한 식사 대신 혼자가 좋은 내향인은손이 노래질 때까지 귤을 까먹으며 소파에 누워 신문을 보고 글을 읽는다. 여기저기 책을 쌓아두고읽으며 긴장에 지친 나를 달래 본다.차곡차곡 글자를 눈에 담고 삼켜서 쌓아놓는다. 켜켜이엉켜버린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람들 틈에서 잃어버린 언어를 찾는다. 정체를 알 수 없이 흩어지고 만 흐릿해진 마음을 다듬는다. 내 언어로 나다움을 찾으려 가만히 머무르는 시간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에 서툴다. 연애와 육아도 마찬가지였다. 막막함을 없애려고 책을 읽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말이 막힐 때 관계가 막힐 때도 책을 찾아서 읽었다. 책으로 배운 모든 이상적인 기준에 현실을 끼워 맞추려고 했다. 만족하지 못했다. 현실은 책과 같지 않고 책도 현실 같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어긋났다. 그럴 때마다 관계에 대한 기대치는 높지만 두려움이 많은 나를 탓했다. 관계의 실수가 반복되고 쌓여갈수록 위축되었다. 내 기준이 이상적으로 높다는 것은 몰랐다. 나에게 맞는 관계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거꾸로 형식적인 기준에 나를 끼워 맞추지 못해 불안이 높아졌다.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거절당할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부지런을 떨었다. 마음을 내어주고 곁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가까워질 일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상처받기 싫어서 아예 관계를 차단하는 자기 방어였다. 혼자가 편하다고 여겼고 실제로도 혼자 있는 것이 제일 편안했다. 외롭다 느낄 때가 있었지만 상대와 가까워질수록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웠다. 실은 의지하고 기댈 곳이 필요했다. 필요 없다고 했지만 필요했고 괜찮다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사실은 엄마를 대신할 엄마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맸다.
혼자가 편한 내향인이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조직생활을 하는 어른에게 일종의 사회성 부족과 비슷한 말처럼 쓰인다. 그래서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외향인의 가면을 쓴다. 쓸데없는 오해와 소문을 만들기 싫어 성향을 숨긴다. 사람들 속에서 있지만 금세 지친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일부러 만나려 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심심하고 단조로운 하루라는 방어막에 나를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