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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희 Dec 27. 2021

아플 땐 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아프다가 끝난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병가의 시작은 우리 딸이었다.


엊그제부터 딸아이가 열이 났다. 크리스마스를 너무 기대하고 땀을 내서 일까. 24일 낮부터 어찌나 기다리고 흥분했는지 저녁 내내 메리야스에 팬티만 입고는 날다람쥐 마냥 신이 나서 쫑쫑거리며 돌아다니더라 했다. 구글 사이트에 있는 산타 추적기를 켜놓고 매시간 산타가 언제 오는지 모니터만 들여다봤다. 급기야 덥다고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루돌프야 어디 있니~" 오지도 않는 연신 찾아대고,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고집부리고 찬바람을 쐐더니만 결국엔 콧물 훌쩍 사달이 난 거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크리스마스의 낭만은 저 멀리 산타 선물 바구니에 싣고 멀리멀리 저~~ 멀리 떠나버렸다. 투명하게 흐르는 아이의 콧물을 닦으며 25일 아침을 맞이했다. 뭐라도 먹어야지. 어제 먹다 남은 반만 남은 찌그러진 화이트 케이크를 퍼먹으며 본격적 병간호를 자축(?)해본다. 참으로 화려한 크리스마스다.


딸아이는 저녁이 되자 본격적으로 열이 나기 시작했다.  37~38도를 오르락내리락. 이 밤중에 pcr검사를 먼저 받아야 하나 고민도 해보았지만, 조금 열이 나고 코 만났을 뿐.. 컨디션은 너무 좋았기에  열이 나는 딸아이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긴긴 26일로 넘어가는 밤을 지새웠다.


27일이 밝았다. 다행히 아이는 더 악화되진 않았고 열은 좀 내리고 밤새 잠도 잘 자주 었다. 저녁이 되니 더 많이 좋아졌다. 나는 새벽에 알람 맞춰놓고 시간마다 깨서 체온 측정하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밤새 열 보초 선 보람이 있나 보다. 저녁이 되니 내 몸이 녹초가 되고 몸살이 도는 것만 같다. 조금만 힘들면 꼭 탈이 나는 곧 중년의 아줌마...

반면 아이는 조금 컸다고 회복력이 훨씬 좋아졌다. 이렇게 해를 거듭할수록 더 튼튼해지고 강해진다. 마치 또봇 변신로봇이 합체의 합체를 거듭해 완전체가 되듯이 말이다. 두 돌 세 돌 땐 꼬박 일주일을 고열에 시달리다 꼭 응급실행이었는데 딸아 너도 참 많이 컸다 싶다.


그렇지만 내 몸은 참 고되다. 아이가 아프면 나도 꼭 같이 병이 나고야 만다. 탈이 났는데 오래갈 거 같다. 이번에는 위장병, 편도선이 붓는 모양새.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크리스마스 이벤트가 비로소 마무리될 모양이다. 아이가  완전체 로봇으로 잘 성장해 주는 모습이라면 나는 엔진에 검은 기름때 낀 삐걱대는 깡통로봇. 알맹이 빠진 껍질만 남은 홍시 껍데기. 조금은 격하지만 이제 곧 40줄에 아이는 5살이니 체력이 후 달리고 슬픈 나이다. 아프니 서럽다. 남편의 손길은 다정하려고 하지만 투박하다. 정성스럽게 나를 만져주고 챙겨주던 엄마의 따뜻한 기가 그립다. 몸이 아픈 것보다 이젠 나 혼자 내 몸을 다스려야 한다는 서러움마저 몰려와 나는 아픈 게 너무 싫다.


내가 아플 때면 나도 엄마 생각이 난다.

나 어릴 적, 7~8살 때쯤까진 난 잘 아픈 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그래도 한번 열이 나면 40도를 오르내리며 며칠을 누워서 끙끙 앓고 나서야 겨우 열이 내렸다고 엄마가 그랬다. 기억이 났다. 두꺼운 솜이불 위에 누워있는 내 머리맡에 스탠드 하나 켜고 밤새 묵주를 돌리며 반야심경을 읽던 엄마의 모습을. 또 기억이 났다. 밤새 뒤척이는 내 옆에서 젖은 수건으로 내 몸을 닦아주던 엄마의 손길 이마를 짚어주고 밤새 내 옆에 누워계셨던 엄마의 모습을.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꼬박 고열로 앓고 나서 자리 털고 일어나 먹었던 엄마가 끓여준 맛있던 라면의 맛. 모든 게 내 기억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 아침, 엄마의 카톡>

결혼하고 나서 친정과는 가깝게 살지만 엄마는 엄마의 마음속에서 나를 독립시키셨다. 아기처럼 품에 자식은 이제 아닌 거겠지. 그저 묵묵히 뒤에서 봐주고 한 발 떨어져서 응원해주는 엄마. 아이 낳을 때도 울 엄마는 그랬다. 제왕절개 하러 들어가는 수술실 길목에서도 엄마는 담담했다. 나중에야 아이를 낳고서 남편이 하는 말 "너 수술실 들어가고 장모님이 많이 우셨어." 내가 아파보니 알겠더라. 그렇게 자식은 커가면서 살 부비 벼 지내는 부모 자식 간은 아니더라도 마음과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느덧, 이렇게 엄마는 아파도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 걱정부터 하는 할머니라는 위치에 서있고 이제 나는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할 중년의 엄마 사람이 되었다.  

우린 원래 참 친하고 친구 같은 모녀 사이다. 결혼 전에 본가에 같이 살 때, 퇴근하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엄마 무릎에 올라앉아 뒤늦은 어리광도 부렸다. 엄마 힘들어. 밥 줘~한마디면 밥이 뚝딱 차려졌다. 어느 때라도 내가 아프면 다 큰 딸 이마도 짚어주고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잠이 들던 다 큰 아기였다. 참 포근하고 보호받는 기분을 느꼈던 그때. 이렇게 나는 아플 때면 어릴 적 엄마의 사랑이란 기억에 푹 잠기고 만다.


나도 엄마지만 아프다. 내가 아프면 우리가족 생활이 펑크가 난다. 그래서 그무게가 때론 버겁나보다.아플 때는 나도 엄마 손길이 무척 생각난다.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 먹고 뒹굴뒹굴 한숨 푹 자고 싶다. 아이 걱정은 잠시 뒤로 한 채 , 내 몸 한 번 추스르는 하루를 갖고 싶은 오늘이다. 아이 보살피다 병까지 나버리는 엄마들이 나하나만 하겠냐만은... 오늘 하루는 왠지 메스꺼운 속을 부여잡고 잠 깨어보려 커피 한잔 억지로 먹어보자니 조금은 속이 쓰리고 마음이 짠해진다.



엄마도 아이였다.

다 큰 어른인 냥 어른 행세를 하고 엄마 말에 말대꾸나 툭툭하는 40줄 가까운 늙은 딸이지만, 마음이 약해질 땐 다시 8살로 돌아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다 큰 어른이 왜 주책이냐고들 하지만 몸이 아픈 날에는 나도 엄마품에서 잠들고 픈 아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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