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약 7개월의 시간의 금세 지나갔다. 이제는 일도 익숙해져서 바쁘고 힘들지만 견뎌낼 만큼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뒤늦게 출근한 선배들이 티타임을 갖자며 함께 근처 카페로 향했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잡은 선배들은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이 프로그램에서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토크쇼를 만드는데 작가가 단 4명이었다. 심지어 메인 작가님은 일주일에 한 번 회의에 참석해서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다가 가는 사람이었고 (도대체 왜 이런 사람을 돈 주고 쓰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다.) 실질적인 구성회의와 대본작업은 선배 2명이 나눠서 했으며 자료조사, 촬영준비 등의 허드렛일은 나 혼자 다 해왔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작가 세팅에 불만이 없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제작사의 팀장과 작가 선배들 사이에 묘한 신경전이 있었는데 결국 터질게 터지고 만 것이다.
선배들은 내게 본인들은 나가기로 결정을 했고 나에게 선택권을 주겠노라 말했다. 이 팀에 남아있겠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같이 그만두겠다고 하면 다른 좋은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힘든 시기를 거쳐서 이제야 선배들과 좋은 관계를 쌓아가던 내게 새로 다른 작가들이 들어왔을 때 또다시 좋은 관계를 형성해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초반 너무 힘들게 했던 이 선배들을 나 또한 뒤에서 욕하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선배들에게 의지를 해왔던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선배들에게 나 또한 이곳에 남지 않고 함께 그만두는 쪽으로 선택을 했다.
보통 레귤러 프로그램에서 작가들이 교체되는 경우 팀 전체가 싹 다 교체되는 경우는 드물다. 팀 내에 큰일이 있지 않는 한은 대부분 몇몇 작가들만 나가고 들어오면서 자연스러운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한 팀이 전부 다 그만두게 될 경우에는 새로 들어올 작가들에 대한 배려로 기본 시스템을 가장 꿰차고 있는 막내는 남겨두는 경우들이 있다. 이 팀의 팀장(PD)도 그런 식으로 나에게 남으라고 ‘명령’을 했다. 하지만 이미 곪을 대로 곪아버린 피디 작가와의 관계가 너무나도 불편했고 또 지금 내가 하는 업무의 강도와 전혀 비례하지 않은 바우처에 남아 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최소한의 인수인계는 다 하고 나가는 것으로 내 할 도리는 다 하겠다는 의지를 전했다.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은 나를 제외한 모든 작가들은 마지막 녹화를 하고 그만두었고 나는 다음 녹화 때까지 남아 새로 오는 작가들에게 한 번의 녹화 준비를 같이 하면서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인수인계를 해주고 나가는 것이었다. 계획 대로 나의 인수인계까지 모두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고 나는 선배들이 새로 소개해준 프로그램에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팀장에게 전화가 왔고 대뜸 나가지 말고 계속 출근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물론 나는 이미 그만두기로 다 얘기되었고 인수인계까지 끝났으며 선배들이 소개해준 프로그램에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못 간다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팀장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너는 나가면 안 되지, 야이 개XX야! 니가 뭔데 나가고 말고를 니 마음대로 정해! 너 새로 출근하기로 한 곳이 어딘데? 어떤 제작사에 어떤 프로그램인지 말해봐! 내가 거기 연락해서 너 앞으로 작가 일 못하게 만들 테니까 알아서 해!”
전화를 붙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작가 일을 시작한 지 1년도 채 안돼서 내 작가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무서웠다. 결국 나는 내일 다시 출근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바로 선배들에게 전화를 해서 소개해준 프로그램에 출근을 못할 것 같다는 얘기와 함께 팀장과의 통화 내용을 전달했다. 너무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참느라 코맹맹이 소리를 냈던 것 같다. 내 전화를 받은 선배들은 아주 크게 흥분하고 화를 내며 본인들이 팀장에게 얘기를 할 테고 뒤탈 없을 테니 절대 출근하지 말고 새 프로그램으로 바로 출근하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나는 새 프로그램에 출근을 했고 다행히 팀장으로부터의 연락은 더 없었다. 선배들이 직접 팀장과 통화해서 나는 그만두고 다른 프로그램에 간다고 통보를 함과 동시에 인수인계가 더 필요하다면 본인들이 직접 가서 새 작가들에게 나머지 인수인계를 하고 오겠다고 엄포를 놨다고 했다. 팀장과 감정이 좋지 않은 전 작가들이 새 작가들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지 뻔하기 때문에 선배들이 와서 좋을게 하나도 없었다. 결국 선배들의 전화 한 통화로 이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작가들은 내가 준비한 촬영분이 방송이 나가면 바우처를 받는데 보통 일을 그만뒀어도 아직 방영되지 않은 촬영분들이 있기 때문에 한, 두 달에 걸쳐서 바우처가 계속 나오는 경우들이 많다. 나 역시 일을 그만둔 후에도 받아야 할 바우처들이 약 4개가 남아있었는데 월급날에 2개의 바우처밖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내 바우처가 20만 원이었으니 총 80만 원 중에 40만 원만 들어온 것이다. 정말 하기 싫지만 다시 그 팀장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야이 개XX야! 너가 촬영 준비한 게 아니라 너는 인수인계 한 거잖아, 그럼 그 돈을 너가 받는 게 맞아? XX놈이 이딴 전화 또 하기만 해봐 죽여버릴 테니까!”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어야만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돈이다. 내가 준비한 아이템으로 내가 촬영을 했는데 내가 돈을 못 받는 게 말이 안 된다. 고작 40만 원이 주기 싫어서 쌍욕을 섞어가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작가한테 모욕을 주고 협박을 한 것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데 그 당시는 세상에 그 프로그램이 전부였고 그냥 이 바닥이 원래 이렇게 돌아가는 거라고 생각을 했다. 최근 <나는 솔로> 남규홍 PD 사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일이다.
다만, 내가 겪었던 일은 10년이 훨씬 지난 옛날 일인데 이런 일들이 10년이 지난 후에도 어디선가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혹시나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단 방송계가 아니라 일반 직장인이라고 할지언정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한 발자국만 밖에 나오면 아주 작고 별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이 세상에는 나에게 쌍욕을 퍼붓던 팀장이, <나는 솔로>의 남규홍 PD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결코 그들에게 굴복할 이유는 절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