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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작가 Jul 15. 2024

위기 봉착, “제가 그만두면 해결될까요?”

  

  새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가면서 나도 새로운 업무들에 점차 적응해 나갔다. 주요 업무로는 매 회차 연예인들이 찾아가 응원할 사례자를 찾고 촬영장소를 섭외하고 소품을 준비하는 일등이었다. 사례자를 찾는 일은 다행히 <싸이월드>를 통해 신청을 받았기 때문에 쓸만한 사연들만 솎아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문제는 싸이월드로 신청을 받기 때문에 다들 너무 쉽게 신청글을 보냈고 그 글에서 사례자의 연락처를 적지 않는 사태가 만연했는데 <싸이월드>를 통해서 쪽지나 글을 남겨도 답장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던 것은 이 당시 미니홈피 주소를 보통 본인의 핸드폰 번호로 설정해 놓는 경우들이 많았다는 것이다.(물론 나 역시 핸드폰 번호를 주소로 설정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개인정보 노출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한 시대였던 것 같다.)     


  만약 미니홈피 주소가 핸드폰 번호가 아니라면 일촌평에 친해 보이는 다른 사람의 미니홈피로 들어가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의 핸드폰 번호로 연락을 해서 당사자의 연락처를 수배하고는 했다. 당사자와 연락이 되면 좀 더 디테일한 사연을 들어보고 어떤 식의 응원을 받고 싶어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등의 간단한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사례자가 정해지면 구성회의를 통해서 어떤 방식의 ‘플래시몹’으로 깜짝 몰래카메라를 할 것인지 정했다. 구성이 정리되면 이에 따라 필요한 소품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직접 소품들을 구매하고 대여하는 업무가 이어졌다. 그래도 소품을 준비하는 과정은 FD, 또는 조연출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조금은 수월했다. 이렇게 막내 때 함께 일했던 FD, 또는 조연출들과는 싸우기도 많이 싸우는데 그러다 보면 미운 정도 많이 쌓여서 결국 팀 내에 가장 믿음직스러운 내 편이 되고는 했다.      


  구성 회의와 소품 준비를 하는 동시에 촬영 장소 섭외도 함께 진행되었다. 장소섭외는 일의 경중을 따졌을 때 조금 더 중요한 편이기 때문에 선배들과 업무를 배분했었다. 메인 장소들은 선배들이 나서서 섭외를 하고 나는 대체가 가능한 쉬운 장소들 위주로 배정을 받았는데 여기서 큰 위기가 한 번 찾아왔다.     


  내가 섭외하기로 한 장소는 MC들이 촬영 막바지에 벌칙을 받는 장소로 평소 선행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 중식당에서 양파를 까는 등 잡일을 도와주는 구성이었다. 프로그램 취지도 좋고 선행을 하는 사장님을 소개하는 일이기 때문에 쉽게 섭외를 했고 답사 겸 저녁식사로 다녀갔을 때도 사장님께서 너무 환대를 해주셔서 식사에 서비스 음식까지도 후하게 대접을 해주셨었다. 그리고 방송 다음날 사장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장님 부인은 굉장히 화가 난 상태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지는 이렇다. 방송 분량상의 문제로 식당에서 벌칙 받는 부분이 엔딩 스크롤 흐르는 와중에 약 1분가량 밖에 나가지 않았고 식당이 방송을 탄다는 것에 한껏 큰 기대를 안고 있던 사장님 내외는 본인들이 베풀었던 호의에 큰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내게 따지고자 연락을 한 것이었다.      


  물론 처음 회의에서 이렇게까지 마치 ‘쿠키 영상’처럼 나갈 구성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사 과정에서 분량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거나 방송 전에 사장님께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했는데 이런 경험이 전무했던 나는 시사 과정에서 문제가 될 것을 예감했지만 내 섭외능력을 문제 삼게 될까 봐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고 사장님께는 혹시나 그냥 보고 별말 없이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함으로 연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통화를 이어가던 사장님 부인은 전혀 화가 누그러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어떻게 조치를 취해달라는 말도 없었다. 그저 이 화를 누군가에게는 풀어야겠고 그 화풀이 대상이 나였던 것이다. 30여 분 동안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던 나는 일방적인 폭언들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어떻게든 빨리 정리하고 이 전화를 끊고 싶었다. 한참을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내 이성의 끈이 '툭'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너무 죄송합니다, 이렇게 난처한 상황을 만든데 책임을 지고 제가 이 프로그램을 그만두겠습니다.”     


  평소 선행을 많이 하기로 유명했던 사장님 부부는 한 청년의 인생을 망가뜨린다는 오명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는지 그쯤 해서 화풀이를 멈추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다행히 프로그램을 그만두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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