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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시임 Oct 01. 2024

생존법. 한로로

한로로 씨 감사합니다.


 가방에서 우유팩이 터져버린 날이 있었다.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등의 교과서가 무거웠나 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떡볶이를 손에 쥐고 놀이터에 앉아 등을 기댔다. 녹슨 철 냄새가 나는 은색 미끄럼틀 아래였다. 햇빛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바닥은 아직 모래였다. 초록색이나 검은색 고무가 깔리기 한참 전의 일이었으니까. 나는 으레 그 미끄럼틀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놀이터라 해봤자 그네와 미끄럼틀, 뺑뺑이와 시소가 전부였지만. 지옥이거나 남극이었던 그곳에서 친구들은 용케 다치지도 않고 시끄러웠다. 그 아슬아슬함을 보는 게 좋아 자주 갔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네만 썰렁하게 삐걱댔다. 시소는 서로 엇갈려 X를 만들고 있었다. 비둘기 고기로 만들었다는 무서운 소문이 들리는 피카추 대신 컵떡볶이를 샀던 날이었다. 묘한 핑크색 디자인이 새겨진 흰 종이컵에 가득 담긴 빨간 떡볶이. 주머니에는 아까워 타지 못한 제티가 하나 들어있었다. 터진 우유는 퀴퀴한 냄새를 뿜어냈다. 떡볶이를 먹던 중에 바지가 젖어 놀랐다. 반짝거리는 모래에 내 가방만 한 사각형 자국이 남았다. 짙은 회색이었다. 서둘러 가방을 열어 확인했다. 교과서 표지가 우유를 머금어 구깃해졌다. 핑크색

하트가 그려진

흰 종이컵에

방금 막 잘린 전선처럼

꼽혀있는

떡볶이를 제외하곤 모든 게 눅눅했다. 필통도 마찬가지였다. 뚜껑에 조그만 거울이 달린, 단단한 종이로 만들어진 사각형 필통 안에는 4B연필과 위에 캐릭터가 달린 0.5 샤프, 그리고 빨간 색연필과 잠자리가 그려진 지우개가 있었다. 빨간 색연필은 저번주엔가 처음으로 실을 뽑았다. 우유를 머금어 비린내를 풍기는 짧은 실이 원망스러웠다. 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주황색 종이 케이스는 찢어지고 있었다. 잠자리는 앞으로 날지 못할 거였다. 고작 200ml짜리 우유가 모든 걸 잠식했다. 알림장이나 파일철에 있던 종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나같이 쪼그라들며 눅진한 냄새를 풍겼다. 급하게 꺼내놓는 바람에 그것들에 모두 모래 알갱이들이 달라붙었다. 반짝. 이번에는 모래 차례였다. 햇빛을 반사하며 내 모든 것들을 우유에게서 다시 빼앗고 있었다. 털면 털수록 종이는 찢어지고, 알갱이는 늘어만 갔다. 다시 반짝. 분명 그날 아침에는 들떴을 거였다. 우유에 타먹는 제티만큼 맛있는 게 없었으니. 편의점은 찾기도 힘들었고, 마트는 오직 심부름 용이었다. 문방구에서는 초콜릿 우유를 팔진 않았다. 어떻게 보면 ‘초코 유유’라는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던 셈이다. 다른 애들은 스트로형태의 초코 알갱이 유행에 편승하고 있었지만, 나만큼은 아직 오리지널 제티를 지키고 있었다. 절대 그걸 사달라는 말을 못 해서가 아니었다. 앵그리버드 인형을 주면 평생  스트로형 초코를 주겠다는 놈도 있었지만 거절했다. 그놈은 분명 내 노란 앵그리버드 인형이 탐났을 거였다.

흔해 빠진

빨간 놈 말고

세모에다가

개나리처럼 노란

앵그리버드는 가방 지퍼에 달려 당당한 자태를 뽐냈다. 다행스럽게도 우유가 거기까지 잠식하진 못했다. 가방에 있던 물건들을 하나씩 벤치로 옮겼다.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 반짝. 네모난 필통과 알림장, 파일철, 반짝. 햇살이 이것들을 다 떼 버릴 거야. 다 옮기고선 떡볶이를 하나 찍었다. 어느새 식어서 떡이 딱딱했다. 빨간 양념 사이로 모래 알갱이가 씹혔다. 모래가 여기까지 잠식했다. 거울로 봤으면 내 입 안도 반짝였겠지. 그렇게 한참을 천천히 씹었다. 떡 하나, 어묵 하나, 다시 떡 하나, 다시 어묵 하나. 못내 아쉬운 마음에 국물까지 마시고, 애꿎은 핑크색종이컵엔 구멍을 냈다. 200원 더 쓸 걸, 그럼 큰 컵이었는데. 자리에서 일어서자 꺼내 놨던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우유’ 글자 아래 초록색 부분에 모래가 쉴 새 없이 우글거렸다. 반짝. 그냥 두고 가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경비 아저씨가 무서웠다. 별 수 없이 우유를 손에 들었다. 모래는 재빠르게 내 손가락으로 옮겨왔다. 손가락이 반짝였다. 꺼내 놓은 짐들을 실내화 가방에 옮겼다. 가벼워진 책가방과 무거워진 실내화 가방, 비어버린 우유 팩과 종이컵. 그리고 가방에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노란 앵그리버드. 그다음에 어떻게 했더라?


 그 뒤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노란 앵그리버드는 어디로 갔더라. 필통은 아마 버렸던 것 같아. 우유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못 썼거든. 그 뒤로는 그냥 천으로 만들어진 필통을 썼어. 캐릭터도, 색도 없는 밋밋한 필통. 주제에 튼튼해서 꽤 오래 썼던 것 같은데. 그래도 거기는 낙서가 많았어. 별로 안 소중해서 험하게 다뤘거든. 그 덕에 고등학교에서도 가끔 그 낙서를 꺼내 봤지. 별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아. 교과서도 아마 버리고 싶긴 했을걸. 담임 선생님이 혼낼까 봐 무서워서 그러진 못했겠지만. 제티는 아마 다음날 먹었겠지. 그날이 무슨 요일이었더라. 매일이 비슷해서 기억이 안 나네. 근데 뭐,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으니 그날이 토요일이 아니었으면 아마 다음날 먹었겠지. 아 그래, 실내화. 바보같이 실내화를 미끄럼틀 위에 올려두고 그대로 와버렸더라고. 그래서 집에 가다가 돌아왔잖아. 그런데 웃긴 게, 바람이 많았나? 돌아오니까 모래 알갱이랑 우유가 다 날아가 버리더라. 실내화 넣으려고 다시 짐들을 꺼내는데 말이야. 한번 손으로 툭 치니까 우수수 떨어지더라고. 반짝거리면서. 그래서 비릿한 냄새랑 구겨짐만 남았어. 어쨌든 실내화까지 챙겨서 다시 집으로 왔어. 그때는 다 약간 노랗게 기억이 나. 그도 그럴게, 웬만한 종이는 거의 다 재사용지라서 노르스름했잖아. 회색이었다고? 아닌데, 노란색이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앵그리버드가 그렇게 좋았나? 지금도 노란색을 좋아하긴 하니까. 어쨌든 그게 다야.


 그 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이런 걸 왜 물어보냐는 질문도 하기 전이었다. 늘 뜬금없긴 했으니 괜찮았다. 언젠가 말해줄 터였다. 그래도 그 애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가끔 사랑한다고 했으며 결혼하자는 말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둘 모두 결혼을 생각할 나이기는 했다. 주변에서도 언제 결혼하냐며 물어보곤 했다. 그러나 그래서 더 할 수가 없었다. 둘 모두 서로를 끔찍이 사랑하기는 했다. 또 그래서 결혼하자는 말이 나오진 않았다. 결혼은 계약이야. 우리는 계약 관계가 되고 싶진 않잖아. 그래도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다. 그 애를 처음 만난 건 어느 독서 모임에서였다. 나는 당시 독서 모임 사람들에게 동질감과 혐오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모임이 성비를 칼 같이 반반으로 맞춘다는 것과, 그래서 멍청한 인간이 아닌 똑똑한 짐승들이 모인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애는 그렇지 않았다. 짐승이나 인간이라기보다는 모임을 할 때마다 카페에서 빌렸던 화이트보드 같았다. 쓰는 대로 써지고, 지워지는 대로 지워지고. 나는 그런 그 애가 마음에 들었다. 왜인지는 뻔했다. 줏대 없는 인간이 좋았으니까. 온 세상이 줏대로 가득 차 어딜 가도 콩나물시루 같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빽빽한 숲을 비집고 지나가야 하는 잠자리 같았으니까.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천적이 가득한 그 숲을.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그 모임의 순기능에 혐오감이 일었다. 그날은 아프다며 도망치듯 나왔다. 혐오감이 옮겨왔기 때문이다. 창밖을 보니 먹구름이 가득이었다. 곧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장마가 길었다. 언제까지 가는지, 이러다 또 집에 물이 세는 게 걱정이었다. 이게 다 그놈들 때문이었다. 매일 같이 집 앞에서 담배 피우는 놈들. 그놈들이 버린 꽁초가 하수구를 막아 물이 창문으로 다 들어왔었다. 겨우 다 치웠지만, 한번 물기를 머금은 장판과 벽지는 금세 거무죽죽한 곰팡이를 품었다. 아무리 환기를 시켜도 곰팡이의 고린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빨리 이사가 가고 싶었다. 빨리 해야 하는 일들도 많았다. 빨리, 빨리, 빨리.

 그 애가 유년 기억을 물어본 이유는 금방 드러났다. 도트로 된 떡볶이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앵그리버드는 간신히 형체만 알아볼 수 있었고, 마지막에 필터를 씌운 듯 그림에 노란빛이 스며 있었다. 배경은 없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좋아하는 건지. 그래도 픽셀로 된 나는 웃고 있었다. 우유팩이 터지기 전이었나 보다. 귀엽지. 그 애의 자랑스러워하는 얼굴이 일렁였다. 귀엽네. 나는 모래는 왜 넣지 않았는지 묻고 싶은 걸 참으며 답장했다. 돌아가고 싶어? 대답 대신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게 이력서에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애의 그림이 나를 그때로 돌려보낸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몰라도 됐던 그때로. 속이 부글거렸다. 왜 모래는 안 넣었어? 그때 반짝이는 건 모래뿐이었는데. 왜 내 기억을 멋대로 헤집어. 네가 뭔데. 앵그리버드는 왜 그 모양이야. 기왕이면 나보다 더 크게 그렸어야지. 너무 커서 내가 보이지도 않게. 아니 그냥 떡볶이에, 앵그리버드에, 모래만 그리지. 그 애는 듣지 못했다. 이모티콘 아래에 네 글자가 추가됐다. 자신 없어? 토닥이는 캐릭터가 힘들어 보였다. 노트북을 닫고 울었다. 그 애가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모른다는 건 무서운 거였구나. 모른다는 건 그래서 고마운 거였구나.


  줏대 없는 그 애가 보고 싶었다. 울고 있는 나를 보면 분명히 얼마 자라지 않은 줏대를 망설임 없이 베어내리라. 그리고 다시 나를 심겠지. 나는 그 애 줏대의 양분이 되겠지.  그 애는 나를 어떻게 기억하려나. 어느새 키보다 높이 자란 줏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려나. 기억되지도, 박제되지도 않았으면 하는 나를 존중해 주려나. 잘라낸 내 단면은 어떤 색일까. 자신이 없었다. 나는 앞뒤로 막힌 사람이었다. 뒤는 막혔고 앞은 닫혔다. 단 하나의 틈만 허용되는 우물에서 나는 쑥쑥 자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랐다. 멈추고 싶었는데 멈출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누군가 잘라주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내실 없이 통통해진 줄기에 모래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래 파묻혔다. 다시 그 애가 미웠다. 거울을 처음 만든 사람은 욕을 먹었을 거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보고 싶어 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다. 없는 가지를 줄기에서 찢어내 내밀어야 한다. 잘려야 한다. 그 애는 나를 잘라내며 울 거다. 제 살을 조각내는 것처럼 아파할 거다. 그러나 나는 울지 않는다. 아파하지 않는다.  


 소나기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내리기 시작한다. 창문을 닫고 밖의 동태를 살핀다. 물이 차는 것 같으면 재빠르게 나가 하수구를 뚫어야 한다. 저번에는 하수구에서 온갖 오물이 나와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 원래는 뭐였는지 구분도 안 가는 것들이 검은 뭉탱이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것들은 고무장갑을 뚫고 제 존재를 과시했다. 장갑을 벗었는데도 손에서 악취가 났다. 찐득하게 붙어 아무리 손을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 그 검고 깊은 뭉탱이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을 때, 장갑 안으로 조금 들어갔었나 보다. 하루 종일 손을 씻었다. 옮을 것 같아 두려웠다. 잘라낼 수 있다면, 잘라내도 아프지 않다면 잘라냈을 텐데. 다행히 이번에는 막히지 않은 것 같았다. 창문 밖으로 빗물이 쌓이지 않았다. 순간 내 얼굴이 비췄다. 홀린 듯 다시 노트북을 킨다. 검정 화면에 내 얼굴. 이러면 입 안이 반짝여도 모르겠네. 대신 SAMSUNG 글자가 반짝인다. 그런데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뭔가를 했어야 하는데. 그게 뭐였더라? 빨리, 빨리, 빨리.

    

눈물은 반짝이겠지. 그래도 하나는 반짝이겠구나.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곰팡이가 조금씩 잠식해 나가는 게 느껴졌다.


돌아갈 수 없지만 돌아가고 싶은 것과, 알고 싶지만 모르는 것. 그러나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걸까요. 오랜만에 글을 써서 비루합니다. 그래도 모쪼록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계에 서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넌 나를 사랑해 줘야 해
슬프게도 반짝이는 소멸 직전의 별처럼
넌 나를 사랑해 줘야 해
평범하길 빌어왔던 내일이 없을 것처럼
난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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